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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Feb 23. 2024

일상이 무너졌다

나는 남들과 다를 줄 알았던 오만함을 반성하며

얼마 전 나는 12시에 일어났다. 점심 12시. 새벽2시에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12시까지 깨지도 않고 잤다.

여태껏 나는 본투비 아침형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어릴때도 나이 들어서도 내 기억속에 10시 넘어서까지 잔 적은 입원해야 할 정도로 아픈 때가 아니면 있어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내 기억하는 한은 단 한번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한번은 그럴수도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수나 프리랜서일수록 자기만의 루틴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활이 무너져버리면 건강도 무너지고 엉망이 된다. 사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이유로 뉴욕에서 온 후로 계속해서 거의 누워만 있었다. 날짜로만 따지면 거의 한달쯤. 집안꼴은 엉망이 되었고 쓰레기와 설거지는 며칠이고 쌓여있었다.


사실 이번 회차에는 백수에 뭣도 없는 중년의 비혼여성인 나의 자존감을 지탱하는 8할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청결과 주변정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변명하자면, 분명 백수가 된 이후로 석달 정도는 비교적 깔끔하고 정돈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내 집 구석구석 누굴 데려와서 보여줄 것도 아니지만 안 보이는 곳의 먼지를 깨끗이 닦아내고 이불을 비롯한 패브릭을 세탁 청소하고 스타일러 등을 활용해서 옷을 깨끗하게 보관하는 일을 하면서 혼자만 아는 그 뿌듯함과 후련함이 너무 좋았다. 회사일을 할 때보다 어쩌면 더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이 일은 오롯이 나만을, 나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일이고 그 성과도 뚜렷이 보이니까.

그리고 그 혜택을 누리는 것도 오롯이 나이기 때문에.


 요즘 세대에 청소붐이 불면서 유명연예인들도 청소를 소재로 한 콘텐츠들도 많이 제작하고 있고 반응도 뜨겁다고 한다. 다는 아니지만 일부 이해가 된다. 어떤 마음인지. 공부나 일이 그렇듯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되고 결과물도 더욱 좋아진다. 하지만 일의 경우에는 나만 잘한다고 꼭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내 뜻과 다르게 흘러가는 일들이 많다. 그리고 사람. 타인은 정말 어떤 땐 지옥이다. 그 사람이 나빠서도 있지만 나쁘지 않아도 서로의 입장과 관점의 차이에 따라선 서로가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그렇게 치열하게 갈등하다가 좋은 아웃풋을 만들어 낼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많다.

그리고 너무도 싫어하는. 그놈의 이간질, 정치질.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청소는 다르다. 그냥 내가 잘하면 된다. 내가 못하면 엉망인 거고, 내가 잘하면 결과가 좋다. 남탓 할래야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남도 낄 일이 없다. 내 인풋이 오롯하게 아웃풋이 되고 나의 성과가 나의 보상으로 바로 이어지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열광할 밖에.


  살림이 대체적으로 그렇다. 또 좋은 점은 남이 잘한다고 해서 내가 깎여내려가거나 밟히지도 않는다. 잘 하는 타인이 있다면 그저 배워서 내 살림을 더 윤택하게 하는데 쓰면 된다. 너도 좋고 나도 좋다. 그 즐거움에 빠져서 백수가 된 후로 놀기도 했지만 살림에는 그래도 꾸준히 힘썼다. 그러다 순식간에, 좀 피곤해하는 사이 와장창 무너진 것이다.


 청소를 비롯한 살림은 몇일만 느슨해져도 흐트러진 티가 확 난다. 꽃을 꽂아둔 화병의 물은 매일 갈지 않으면 쉬 시들고 비린내도 난다. 설거지를 하루만 안 해도 얼마나 냄새가 나겠는가. 음식은 계속 시켜먹기만 하니 플라스틱 쓰레기는 기하급수적으로 쌓였다. 아무리 일정이 없어도 하루 한번은 나가 쓰레기를 버렸는데 3일도 일정없으면 나가질 않으니 집이 쓰레기통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한번 망가지니까 더 하기 싫어지더란 거다. 그렇게 나태지옥에 빠져들면 쓰레기 소굴이 되는 것이다. 수면루틴도 망가졌다. 숏츠 같은 걸 소파에 누워 계속 봤더니 새벽 2시는 기본이고 어떤 날은 날이 밝아올 때까지도 침대로 가지 않았다.

그러다 12시 기상을 하고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폐인이잖아.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좀 다른 줄 알았다.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냥, 타고나길 아침형인줄 알았다.

회사다닐 때도 늦잠을 잔 적은 거의 없었다. 학생 때도 그랬다. 밤을 새면 샌 대로 제시간에 일어나서 생활했다. 물론, 직업적 특성상 새벽에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수면리듬이 바뀔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백수지 않은가. 어쩌다 하루이틀 나태해진 걸로 내가 정신이 번쩍 들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나한테 관대하다 ㅋㅋ

내일부터 잘하지 뭐.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멀티비타민을 퍼먹은 후에 쌓인 설거지부터 하나씩 해치웠다. 맨날 하던 침구 청소도 다시 시작했다. 무너진 살림은 한번에 바로 회복되지 않는다. 오늘은 설거지 쓰레기 분리수거, 내일은 침구세탁 이런 식으로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늦어도 2시 이전에는 침대에 누웠다. 늦게 누워도 무조건 8시에 일어났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며칠을 하고 났더니 이제서야 좀 머리가 맑아졌다.  어느 전문가분이 삶이 힘들면 정리정돈부터 하라고 했다던데 그말에 정말 공감한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하나하나 정리될 때마다 마음도 편안해진다. 아직 정리가 덜 끝나긴 했지만 오랜만에 이불 세탁에 스팀청소까지 했더니 침대에 누울 때 감촉이 다르다. 한동안 맨날 기분나쁜 꿈에 시달렸는데 꿈자리도 사납지 않았다.


 며칠 전에 지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나도 모르게 행복하다고 말하게 된다. 자랑같아서 안 하려고 하는데,

직장생활 때의 내 모습이 생각나고, 그리고 얼마나 그때 내가 찌들었는지가 자꾸 보인다. 어제인가 어떤 프로에 배우 다니엘 헤니가 나와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이유가 더이상 '선택'을 기다리기 싫어서라고 말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선택하기보다는, 선택받고, 강제로 선택당하며 산다. 그래서 너무 공감이 갔다. 그 대단한 다니엘 헤니도 오디션을 보며 지긋지긋한 그 선택받는 삶이 싫다는데. 억만금은 없지만, 명성도 없지만, 그냥 두다리 뻗고 등따습게 누워 눈비오는 날 안 나가도 되는 삶이 있다는게 눈물나게 감사하다. 물론 필요해진다면 나가서 또 생업전선에 뛰어들겠지만 어쨌든 한동안은 방구석 퇴사자로 살 테니 얼마나 감사한지.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그저 배부르기만 하다. 그 감사함을 계속 상기하면서 나태해지지는 말아야겠다 다짐한다. 귀찮으면 창문이라도 열자. 다 싫으면 청소기만 밀자. 이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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