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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Apr 05. 2024

살고 싶었다

이상한 선택을 한 초중년 은퇴자의 백수예찬, 죽지않아!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냥 어느날 문득, 내가 그땐 왜 그랬을까 하기도 하고, 어떤 이의 의중을 오해했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떤 때는 돌이켜 보니 그때 내가 왜이렇게 미련하게 참았을까 할 때도 많다. 물리적 시간도, 심적 여유도 늘어난 백수만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종교를 가지고 있을 때 주말이면 언제나 지난 주의 일들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을 갖곤 했었다. 백수든 아니든, 이런 시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동안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럴 수 있다. 현생이 바쁜데 언제 뭘 돌아보겠나.


 요즘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장기하님의 '나란히 나란히' 라는 곡이다. 헤어진 연인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요즘 하는 생각들과 맥이 닿아 있는 것 같아서인 것 같다. 이 곡은 화자(나)가 헤어진 후에 사랑하던 이와 자주 손을 잡을걸, 나란히 볼 걸 그랬어 등의 이별 후의 생각들을 담담히 전하고 있다. 그분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래서 헤어짐을 후회하는 건지, 그저 이별을 돌아보며 하는 생각의 잔상들인지. 하지만 난 그냥 이미 끝난 과거에 대한 아쉬움의 소회라고 느꼈다.


 어제 한참을 비행기를 타고 남반구의 따뜻한 도시를 향해 달리면서 나는 며칠 전 의사선생님이 했던 질문을 생각했다.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세요? 후회하거나 불안하지 않으세요?" 이상하다. 난 안정적 직장에 있을 때 가장 불안하고, 우울했다. 백수가 된 지금 불안정해진 나의 미래가 더 불안해야 맞는 것인데 이런 평화로움과 안정감은 어릴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후회는 되지 않는다. 숙고하고 숙고한 결정이므로 이대로 굶어죽는대도 내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선택 자체에는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은 살아가면서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서,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았던 것 같다. 숨쉬듯 지나가는 시간이 언제 멈출 줄 모르면서, 우린 영원할 것처럼 산다. 우린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죽음은 허무하다. 그나마 예측이 되는 긴 병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죽음은 급작스럽고 불미하다. 아니, 병마는 또 어떠한가. 사랑하는 이들을 끝모를 슬픔과 고통에 몰아넣고는 일순간 사그라든다.


 죽음같은 느낌의 고통(공황)이 마흔을 앞두고 왔었다. 가족력 때문에 심근경색이 온 지 모른다고 몇번이고 착각했던 그 순간이 다 가짜라고 정신과 의사선생님이 말하는 순간 공포는 반감되었다. (그렇지만 올때마다 혹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흔이 되는 해 해외 어느 고속도로에서 트럭에 받혀버린 차가 빙글 돌 때는 진짜 "이것이 죽음이구나" 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종말. 옆자리의 환갑이 넘은 엄마에겐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랬다. "이렇게 죽는다고? 죽는구나!" 몇 시간 후, 몇 일 후에 난 그랬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날도 채 밝지않은 시간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마르지 않은 머리를 털며 빈 사무실에 제일 먼저 도착해 사실은 별 관심도 없는, 진정 나와 별 상관도 없는 회사의 일을 하며 죽상을 애써 숨긴 가식적인 표정으로 12시간을 꼬박 쓴 후에야 비로소 소파에 누울 수 있는 삶이었다. 매달 20일 좋지도 않은 시간을 보낸 대가를 받고 주말이 아닌 평일 하루 아니 반나절 쉬는 것조차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허락을 받아야 하는 비루한 삶이었다.  그 비루한 삶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 죽기 싫었다. 온 몸에 올라온 두드러기인지 알러지인지 뭔지 모를 가려움증에 시달렸고 피를 온 옷과 침구에 묻혀가며 버텼다.(속옷 겉옷 다 피가 안 묻은 옷이 없다) 3년전 회사일을 계기로 다니게 된 정신과는 언제쯤 졸업할 수나 있을지. 약은 9알까지 늘어났고 겨우 반 알을 줄였다. "여기까지만 하자." 결혼생활도 이쯤 되면 졌잘싸 아닐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 퇴직을 가족들은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반대했어도 그만둘 거였지만)


 나중에서야 진정으로 깨달았다. 난 죽고싶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 살고 싶었다는 것을. 그냥 어느날 갑자기 자러 가는데 그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 살고 싶었구나. 살려고 지금까지 이랬구나. 누군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참 잘했다고. 밑도끝도 없이 그 생각이 들었다.


 생에 대한 집념이 남다른 건 유전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 불법이든 합법이든 주저하지 않고 하시던 분이었다. 중환자실을 제집 드나들듯 했을 때 할아버지는 우리 엄마에게 "제발 나좀 죽여다오"라고 했다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진심이 결코 아니란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 할아버지는 아침을 드시고 평온하게 주무시다 가셨다. 그때 엄마가 할아버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어땠을까. 엄마 꿈에 두고두고 나타나며 저주하셨을 양반이란 건 나도 알고, 엄마도 알고, 아빠도 안다.

 

 어쨌든 지금의 삶은 내가 살고자 한 선택이었고, 죽음 가까이에 다녀오니 꽤 허무하기도 했다. 이렇게 죽는 게 쉽다면, 죽기 전에 하고싶은 건 다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몇십개의 버킷리스트가 나왔다. 그 버킷리스트를 꼭 천천히 실현해야 하는걸까? 할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다 누리고 죽고싶었다. 어쩌면 얼마 후에 종잇장만큼 얇아질지도 모를 지갑과, 마일리지를 얼른 다 써재끼고 싶어서 대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동시에 건너는 세계일주를 할 만큼 모인 마일리지를 쓰기 위해 비행기표를 사냥 중이다. 매달 해외에 놀러 가는 부자도 아닌! 인간이 몇명이나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내가 그렇다. 날 좋은 도시에서 한달살기도 해야하고,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오로라도 보러 떠날 거다. 일단 한달살이를 위해 지금은 호주에 와 있다. 올해 하반기엔 아마도 유럽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가족들은 말했다. "미친 거 아냐?"  의사선생님도 말했다. "ADHD일지도 모르겠어요. 하고싶은 것만 하고, 지루한 것은 참지 못하는." 미친 것 아니고, ADHD까지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둘다 맞다 해도 상관없다. 그러면 뭐 안돼? 어차피 언제 갈 지도 모르는 거. 하고싶은 것만 하다 가도 아쉬운 게 삶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남에게 해를 주면 안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지금 이순간 가능한 것은 실현하고 살면 뭐 그리 잘못인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흘러가는 대로 사는 생을 살다 내일 눈을 감는 것보단 오늘 시드니에서 맥주 한잔 마시고 내일 눈을 감는 게 낫지않나. (이걸 요즘 말로 욜로라 하나? 욜로도 지난 말인가?) 물론 그렇다고 노년을 아예 등한시 하는 건 아니다만,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기에.


 내 지갑이 얇디얇아졌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아니다. 돈은 이래저래 굴려가며 벌었다. 묻진 마시라. 다만 불법 안 했고 구걸도 안 했다. 코인도 안 했고 도박도 안 했다. 직장을 나오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생각보다는 돈을 벌 방법이 지금 하는 직장생활 말고도 꽤 있다. 반년이 지나도록 잔고는 줄지 않았다. 물론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동안 출혈은 감내할 것이었고 그게 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누군가에게 퇴사를 권유하는 건 아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퇴사가 죽음은 아니었다고. 무엇이 되었든 지금 쥐고 있는 당신의 것이 죽을만큼 힘들다면, 버틸만큼 버텼다면 과감히 버릴 줄 아는 것도 용기다.  당신의 건강과 목숨을 제외하고 없이 못 사는 건 세상에 없더라고.


 행복하다. 이런 삶도 살수 있구나 할 정도로 행복하다. 아주아주 가끔, 이 행복이 사라지면 어쩌나 불안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이 행복만 할 거라고 장담하지 않는다. 어떤 굴곡이 닥쳐도 이겨낼 힘을 가지려면 지금 이 순간들을 잘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왜냐면 힘들어봤고, 선택해봤고, 성공해 봤으니까. 내 뜻대로 살아지는 삶을 경험해봐야 다음 고난도 이겨낼 희망을 가지지 않을까. 세상은 참 이상하다.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매순간 벌어진다. 내가 있는 이곳 시드니는 오늘 폭우가 내렸다. 20년 가까이 산 사람도 처음 보는 폭우라 했다. 그런 날도 있겠지. 너무 멀리 보고 살지는 않으련다. 어차피 한치 앞만 보고 살아도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그저, 오늘 하루를 충분히 살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렇게 허락된 날까지 살고 싶다.


P.S. 오늘은 밤하늘 별을 보러 블루마운틴에 간다.

비야. 그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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