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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 위의 앨리스 Jun 21. 2024

지옥같은 캐나다 탈출기

feat. 망할 XXXX여행사 리턴티켓 취소하기


 몬트리올에서 퀘벡으로 넘어가는 날 아침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보름 정도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한국에 돌아가야 되는 상황이란 안좋은 소식이었다.


 당장 돌아갈 방법이 없어 일단 퀘벡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비가 오다 멎다 하는 흐리고 먹먹한 하늘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퀘벡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자마자 한국으로 다시 연락을 취했다.

 치매가 중증인 할머니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식음도 링거도 거부해서 하루하루가 위험한 상황이었고 내가 20대에 만나 30대를 지나 40대가 될때까지 가장 절친한 존재인 나의 유일무이한 반려견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상태에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전화 중에 아이가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고 함께 간 엄마가 울기 시작했다.

 나도 머리에 있던 피가 온몸을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그 아이와 보냈던 수많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살면서 많은 이별을 했었고 한번도 유쾌했던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충격적이고 당혹스럽고

 후회스럽고 아픈 이별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얼마 후 아이가 머리를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영상통화를 하면서 아이에게 엄마의 얼굴과 음성을 보고 듣게 해줬더니 기운없이 늘어졌던 아이가 눈을 번쩍 뜨면서 귀를 세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가 살아있을 때 한국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말이었기 때문에 표를 바꿀 수가 없었다.

퀘벡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뷰가 좋은 방을 예약해 앉아있었지만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방에만 앉아있기 더 힘들어 밖으로 나갔다.

주말이라 퀘벡거리에 사람이 넘쳐흘렀고 모두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동네에서 불행한 사람은 엄마와 나 둘뿐인 것 같았다.


 엄마는 그 전화 이후로 그날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신경안정제를 먹고서야 잠이 들었다.

매일 엄마의 머리맡 바로 아래 담요에서 웅크리고 잠들던 녀석이 위태롭다니 당연히 엄마의 충격이 더욱더 클 것이다.

하지만 2달된 녀석을 집으로 데려와 독립하기 전까지 몇년이나 방을 같이 쓰던 나도 제정신일 수는 없었다.

나 또한 그날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무슨일인지 빈속인데도 뱃속이 불편해 화장실을 수십번 들락날락했다.

순식간에 바지 허리춤이 거짓말처럼 헐렁해졌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성당에 가서 기도를 했다.

나는 10대때 어떤 일을 계기로 하느님께 뭔가를 해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와 나의 늙은 반려견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차라리 내 기운을 나눠주시라고. 그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다.

크리스마스 상점에 들러도 길을 걸어도 보이는 강아지들때문에 눈물이 났다.

공황 증상이 없었던 지 정말 오래됐는데....불안감에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잊어버리려고 우리는 퀘벡거리를 계속 걸었다.

나중에 보니 그날 2만 6천보 정도 걸었더랬다.

걷다 지쳐 가 앞 공원에 잠시 앉아있는데 바닥분수에서 소리를 지르며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수영복을 아예 갈아입고 노는 여자아이, 원피스 차림으로 물에 생쥐처럼 젖고도 좋다고 분수를 맞고 서 있는 아이, 비데하듯 물줄기를 엉덩이에 대고 있는 아이...한 녀석이 그러고 있자, 아이들은 너도 나도 화장실 변기에 앉는 자세로 물줄기를 엉덩이로 맞고 있었다. 그 심각한 상황에 그 풍경을 보자 웃음이 터져나왔다.

엄마와 나는 한참동안 아이들을 보고 웃었다. 두 존재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슬퍼하던 중에 웃음을 준 게 낯선 아이들이라니. 하지만 아이들이 주는 묘한 에너지가 있었다. 웃으면서도 마음속 깊이 그 아이러니함에 대한 슬픔이 피어났다.


 밤이 되었고 한국은 월요일 아침이 되어 비행기표를 바꾸려 여행사로 전화를 돌렸다. 여행 중 급박한 사정에 의해 리턴티켓을 급히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 많을텐데도 여행사는 죽어라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인터넷으로도 문의하고 문자도 보내보고 해봤지만 응답이 없어 결국 전화기 두대를 돌려 네시간 반이 걸려 겨우 연결이 되어 표가 있는지 없는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최저가란 이유로 여행사를 통해 비행티켓을 구매했는데 돈을 더냈음 냈지 다시는 여행사를 통해 비행기티켓을 끊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때 쓴 국제전화비는 누가 보상을 해주려나.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결론적으론 우리가 끊은 항공티켓은 취소해야 했고 여행사가 너무 전화를 받지 않아서 그냥 내가 항공사앱에 접속해 편도 티켓을 새로 끊어버린 것이 신의 한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린 일주일 후에나 한국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월요일 아침 체크아웃하고 바로 벤쿠버로 돌아와 다음날 한국에 돌아갈 수 있었다. 비행기는 완전히 만석이었고 조금만 늦었으면 우린 표를 구하지 못한 채 며칠을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을 것이다.


 기차를 타고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또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비용도 문제지만 사실 표가 얼마나 빨리 구해지는지가 문제였고 혹시라도 중간에 시간표가 꼬일까봐 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상황을 계속 업데이트 받아야 했는데, 엄마와 나는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카톡수신음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덜컥거렸다. 혹시라도 안좋은 소식일까봐. 내가 편도로 끊은 대한항공 벤쿠버-인천행 비행기에서는 와이파이 서비스도 되지 않아 사이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마음을 졸여야했다.


  그렇게 딱 48시간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가장 빠른 시간안에 돌아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정말 잠도 안 자고 표를 구하고 움직였다. 다행히도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음식을 드시기 시작했고 강아지는 우리가 돌아온다는 걸 알았는지 있는 힘을 다 내어 음식도 먹고 상태가 조금은 호전되었다. 집에 들어왔을 때 녀석은 엄마를 기다린듯이 납작 업드려있는 상태로  힘을 내어 코로 엄마 손을 밀어다. 자기를 만져달라는 의미였다. 녀석은 놀랍게도 일어서서 엄마의 트렁크로 걸어가 엄마 옷냄새를 맡았다. 걷기는 커녕 일어나지도 못해 물도 밥도 겨우 떠먹여야 먹던 아이였는데. 물론 기운은 없었지만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뻤다. 돌아가며 밤새 녀석을 돌봤고 몸은 힘들었지만 캐나다에서 보낸 지옥같은 시간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 할머니도 며칠만에 호전되어 퇴원하시게 되었고 그전같진 않으시지만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일상생활을 하게 되셨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아직 할머니는 살아계시고 우리의 멍멍이도 살아있다. 수의사는 우리 강아지가 신기하다며 여전히 아프지만 조금씩 수치가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매일같이 불침번을 섰어야 했지만 그것도 이틀에 한번, 삼일에 한번으로 그 텀이 늘어났다. 그래도 감사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일이 또 벌어질지는 모른다. 할머니도 아흔이 넘으셨고, 우리 강아지도 사람 나이로 따지면 100살은 훌쩍 넘겼다. 부디 조금만 더 평온하게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한달동안 가족들 모두가 마음을 졸이며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이 좋은 계절을 그냥 지나보냈다.

긴 병에 효자없다는 말은 아프지만 맞는 말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강아지도 가족이니까)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보냈지만 이걸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고 실제로 남은 가족들이 수면부족, 신경쇠약, 불안증세, 신경통 등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고난은 어깨동무를 하고 한꺼번에 온다고 하던데 그 말을 직접 경험해야 했던 한달이었다. 여기에 다 쓸순 없지만 다른 문제들이 연달아 터졌다.

많이 힘들었다. 하루하루 혹시 또 뭔가 터질까 제발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고 살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나는 다이나믹하고 영화같고 드라마 같은 삶을 살고싶지 않다는 걸. 아주 밋밋하고 조용하고 평온하며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는 삶이 좋다는 걸. 인생에서 돈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건강하지 않다면(주변의 건강 포함) 돈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걸. 어제 오늘 겨우 한숨을 돌린 건지 낮잠을 잤고 꽃도 샀다.

TV를 보며 지루하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곳에서 근심없이 지루한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행복임을 비로소 알게되었다.  유일한 걱정은 뱃살뿐이던 일상으빨리 돌아가고싶다.

근심을 잊게 해준 아이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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