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위로-우산없이 비 맞기

by 길 위의 앨리스



나는 비오는 것을 좋아한다. 일단 비가 오면 먼지가 적다. 비염이 있는 내게 먼지란 늘 제거해야할 대상이다. 확실히 비가 오면 재채기나 코막힘이 적다. 공기도 훨씬 맑다. 비가 와서 옷이나 신발이 거추장스럽다는 것, 그리고 대중교통을 탈 때 찝찝하다는 것 등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가 좋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맘때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예상했겠지만 아주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다. 그 사람을 만났을 땐 내가 제법 오래만난 사람과 실연한 직후였다. 감정이 널뛰고 불안했던 시기였다. 친구들이 나를 위해 한명씩 품앗이하듯 소개팅을 시켜주기도 했었다. 만나는 족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별로라서가 아니었다. 다 괜찮고 훌륭한 사람들이었는데...그렇게 마음이 가질 않았다. 당연했겠지. 아직 떠난 사람을 다 마음 속에서 비워내질 못했으니까.


헤어진 직후에 만난 그 사람은 스터디에서 만났다. 헤어진 다음날, 새벽까지 눈이 퉁퉁 붓게 울다가 아침 스터디를 갔다. 우주만큼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도, 삶은 계속되니깐! 완전 나 정신나갔소라고 써붙인 채 스터디를 갔는데 거기에 그 사람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는 그런 꼬락서니를 한 내가 좋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다지 이해는 잘 가지 않지만 뭐.


그렇게 내가 좋다는 그 사람에게도 역시나 마음이 가진 않았다. 실연의 아픔을 술로 다스릴때마다 그가 함께해줬다. 나는 아무 맘이 없던 그에게 편하게 내 얘기를 털어놓고 눈물도 알콜도 함께 털었다. 혼자있고 싶은 날은 참 못됐게도 그의 연락을 무시했다. 그렇게 감정 널뛰는 대로 그에게 막 대했다. 그땐, 어리기도 했고 제정신도 아니었다. 잘 알지도 못하던 그 앞에서 술핑계로 참 많이도 울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한달만에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평소와 다르게 말끔한 차림에 장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가 조금 내렸었고 우리가 술을 마시고 나왔을 땐 비가 제법 굵게 쏟아졌다. 그와 우산을 쓰고가다 내가 그냥 무심코 말했다. "비를 그냥 흠뻑 맞아보고 싶어." 그러자 그가 바로 그 우산을 접어서 멀리 던져버렸다. 진짜로 말이다. 우산을 언덕 아래로 던져버렸다. "미쳤어?" 그랬더니 그가 말했다. "맞아 봐. 하고싶음 하면 되지 뭐 어려워?" 우리는 생쥐가 되도록 비를 쫄딱 맞으며 미친사람처럼 뛰어다녔다.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처럼. 사람없는 골목을 뛰며 맞는 비는 생각보다 신나기도 통쾌하기도 했다.


찝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비를 아예 맞아버리니까 생각보다 시원했다. 어려서 그랬는지 탈모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비가 얼굴로 떨어지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아드레날린이 몸에서 뿜뿜하는 거 같았다. 신나게 비 사이를 뛰며 아이처럼 웃었다. 근심도, 헤어짐의 슬픔도, 분노도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다. 비 좀 맞음 어때? 아무렇지도 않은 그가 그때 처음 좀 멋있어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로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을 많이 지웠다.


그때 그 남자와는 한동안 만났다. 그와는 더이상 연락을 하지 않지만, 그 이후로 나는 가끔 일부러 비가오는 날 비를 맞는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다. 누가 이상하게 바라볼 거라는 걱정은 안한다. 햇빛으로 샤워를 하면 건강에 좋다던데 온몸으로 비를 맞고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그렇게 비를 많이 맞았어도 탈모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 체질인건가. 비가 올 때면 그때 그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 사람은 잘 지내고 있을 것 같다. 나의 못난 면을 모두 보고도 품어준 큰 사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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