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잼잼 Jul 31. 2023

키워드로 보는 일본(3) 섬나라 - 홋카이도, 오키나와

그들은 일본이 아니었다

일본이 지금의 영토를 확보한 것은 언제일까. 많은 이들이 지금의 일본 영토가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지 된 것으로 알 고 있지만, 일본이 지금의 영토를 확정한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로 불과 200년이 되지 않았다. 헤이안 시대 후기인 11세기 중후반까지 도호쿠 이북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이후 에도 시대까지 혼슈, 시코쿠, 규슈만이 일본의 영토였다.


우리는 일본의 영토를 말하라고 한다면 홋카이도(北海道)와 오키나와(沖縄)를 빼놓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 지역은 한국인에게 시코쿠보다는 인지도가 있는 지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불과 150년 전, 일본에 의해 병합된 지역이다. 홋카이도에는 일본인과 다른 아이누 민족이 살고 있었고, 오키나와에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이 존재했다. 각각 각자의 정체성을 가진 민족이 사는 땅이었으나, 본토(혼슈, 규슈, 시코쿠)에 의해 일본이라는 단일국가로 편입되었다.


때문에 홋카이도나 오키나와의 지명을 본토 사람에게 보여주면 잘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본래 아이누족, 류큐인들이 사용하던 지명을 일본어로 음차 했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메이지 일본에 의해 일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미지의 땅, 홋카이도와 오키나와에 대해서 탐구해 보겠다.



눈의 나라와 아이누 민족, 홋카이도(北海道)


하코다테의 고료카쿠(왼쪽), 오타루의 운하(오른쪽)


일본 최북단, 러시아와 마주 보고 있는 홋카이도는 본래 에조치(蝦夷地)라 하여 아이누 민족이라는 일본인과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까지 일본의 영향이 미치고 있던 것은 하코다테를 비롯한 오시마 반도 일대이다. 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극한 추위와 험준한 지형의 특성상 본토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던 중 막부 말기에 이르러 러시아 제국의 남하 정책이 본격화되며, 에조치를 영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나오기 시작했고, 메이지 시대가 시작됨과 동시에 에조치를 고카이도(五街道, 과거 일본의 도로교통망)에 포함한다는 의미로 홋카이도를 개칭하고 일본 영토로 편입한다. 이후 구로다 기요타카를 차관으로 한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홋카이도 개발을 실시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홋카이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이름에 "개척(開拓)"라는 표현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본래 개척은 비문명권에 문명권이 진출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본토가 이러한 용어를 사용해 홋카이도 편입을 실시했다는 것은 이른바 문명인 본토가 비문명인 아이누(에조치)를 문명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누 민족 입장에서는 여지없이 침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홋카이도 개척의 상징, 삿포로 맥주


홋카이도라 하면 삿포로 맥주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맥주캔의 저 별모양만 보고도 삿포로 맥주임을 알만큼 삿포로 맥주는 일본을 대표하는 맥주이다. 그러나 삿포로 맥주가 홋카이도 개척의 상징이라면 어떠한가. 삿포로 맥주의 별은 홋카이도 개척사의 상징인 별 모양에서 따왔다. 개척사에서 만든 브랜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 홋카이도는 관광업, 낙농업, 농업(맥주 등)을 주요 산업으로 삼고 있다. 이들 산업은 대부분 홋카이도 개척사 시절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누인들이 살았던 땅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대부분 수렵이나 채집을 통해 생활하던 이들이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가지지 못한 부족 단위의 민족이었다. 때문에 본토에서는 이들을 쉽게 복속시키고, 계획 농업과 계획 산업을 실시할 수 있었다. 맥주를 비롯한 주류 작물 위주의 농업, 낙농업 및 축산업 등이 홋카이도를 개간하고 개척하는 데에 쓰인 산업이었던 것이다.


현재 홋카이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이곳에 정착해 살던 아이누 민족들도 구토인보호법 등 일본의 동화정책(일본인과 결혼 장려, 아이누어 금지, 창씨개명 등)에 의해 민족적 의식이 약화되고, 오히려 자신이 아이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한다. 아이누 민족의 동화를 위해 사용한 토인(土人)이라는 표현은 여지없이 차별어이며, 조선과 대만보다 훨씬 강도 높은 동화정책으로 스스로의 민족성마저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아이누 민족들은 자신의 정체성의 유지를 위해 싸우고 있다. 2019년 아이누신법이 통과되면서 아이누가 홋카이도의 원주민, 즉 일본 내 소수민족임을 인정했다. 물론 민족자결권 등을 인정하는 법안 내용이 아닌 '다문화 사회' 속 차별을 금지한다는 이념법에 불과하지만, 과거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동화될 것을 요구당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처우가 개선되었다 할 수 있다. 우리가 홋카이도를 가는 것은 일본 스럽지 않은 이색적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이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를 안다면 더욱 그 풍경이 가진 의미를 탐미할 수 있지 않을까.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줄 타던 류큐(琉球), 결국 일본의 오키나와(沖縄)로


류큐왕국의 슈리성(왼쪽), 미 점령기 조성된 국제거리(오른쪽)


오키나와는 과거 류큐 왕국이었다. 중앙집권적 체제의 왕조였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어 보이나 류큐가 독립국으로써 명, 청과 교류해 왔음은 틀림없다. 류큐 왕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받은 하사품을 일본에 파는 형식의 중계 무역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던 17세기,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이 에도 막부에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해 왔으나, 류큐는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사쓰마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하며 류큐는 사쓰마번에 종속되었다.


사쓰마번은 청과의 교역을 위해 류큐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류큐는 청과의 조공 무역은 물론, 막부에도 조공을 바쳐야 하는 이중 무역을 감당해야 했다. 이 때문에 류큐의 재정은 악화되고 인두세 등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등 류큐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1872년, 에도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선 뒤, 본토 정부는 류큐의 독립국 지위를 박탈하고 일개 번에 봉하는 제1차 류큐 처분(琉球処分)을 단행했다. 이후 타이완 섬에 상륙한 류큐인들이 살해당해 타이완에 일본군이 출병했음에도 청 조정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본토 정부는 청나라가 류큐에 관심이 없다 판단, 1879년, 류큐 번을 폐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하는 제2차 류큐 처분을 단행했다. 이로써 류큐 왕국은 완전히 사라지고, 일본국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1945년의 오키나와 전투(왼쪽), 1972년의 미점령기 오키나와의 반환식(오른쪽)


20세기가 되어서도 오키나와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은 오키나와를 홋카이도, 조선, 타이완과 동일하게 취급했으며, 이 지역을 대상으로 사탕수수 수취, 징용, 징병, 위안부 차출을 단행했다. 류큐 왕국 고유 행정구역을 폐지하고, 창씨개명과 류큐어 사용도 금지시켰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일본 상륙을 위해 오키나와 전투를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현민들을 속된 말로 총알받이로 쓰거나, 미군의 포로가 될 바에는 스스로 몸을 부수라는 옥쇄(자살)를 강요하기도 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 전쟁이 종료되고, 오키나와는 중국 견제라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미국의 직접 통치 하에 놓인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미군기지가 오키나와에 세워지게 되는데, 현재 재일미군기지의 70% 이상이 오키나와에 위치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된 1952년, 일본의 주권은 회복되었지만 오키나와는 여전히 미국 통치하에 놓였고, 1972년 미중화해와 일본 국내 여론 조성 등에 의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며 주권을 회복하였다.


류큐 왕국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단일 국가의 경험이 있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류큐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 20세기의 좋지 못한 역사로 일본 제국에 대한 반감이 심하고, 미군 기지 및 미군이 일으키는 여러 사고로 인해 미국에 대한 반감도 많은 편이다. 특히 16세기 이후 독립 국가의 지위를 위태롭게 한 사쓰마번, 현재의 가고시마현과는 견원지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다. 과거보다는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오키나와 독립 여론이 존재하고, 하다 못해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받을 것을 본토에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일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일본의 영토가 된 지 불과 200년이 되지 않았다. 이들 섬은 각각 아이누 민족과 류큐인이라는 고유의 토착 민족들이 있었고, 19세기 들어 일본에 의해 병합된 지역이다. 이들 중에는 조선처럼 일본으로의 합병에 찬성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에 의한 강압적인 병합으로 일본 제국에 대한 반감을 가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이들 지역은 스위스와 같은 이국적 풍경을 가진 동양의 유럽, 미국의 향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본 스럽지 않은 풍경에는 일본으로의 동화를 위한 강압적 개척 정책과 전쟁에 휘말려 일본과 미국 양국을 오가며 종속을 당해온 역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들 민족을 도와 이들 지역을 일본에서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일민족국가론을 내세우며 일본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강압적으로 일본인이 되어간 이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일본이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양한 문화와 이민족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것은 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시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은 갖되, 세계화가 극에 달한 현시점에서 이민족에 대한 거부감을 떨쳐내고 다양한 문화가 함께 어우러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한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키워드로 보는 일본(2) 섬나라 - 규슈, 시코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