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인가 상징인가
일본은 군주가 있는 나라이다. 정치 체제를 확인하면 입헌군주국임을 알 수 있다. 엄연히 천황이 국가원수로서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나 신문기사를 통해 총리를 더 많이 접하면서 총리를 국가원수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천황이라는 존재는 우리와도 많은 연관이 있다. 일본에 병합된 역사가 있는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끊임없이 천황에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이는 식민지배기의 천황이었던 쇼와 천황 재위기는 물론이요 후대인 아키히토 천황(현재 상황)에게도 잊을만하면 요구했다.
천황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사실 역사상 천황이 국가원수로서 일본을 통솔한 역사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막부의 쇼군이나 군부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해 주는, 혹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정통성을 증명해 주는 인물로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이번 글에서는 천황의 역사와 현대 일본에 있어 천황의 의미에 대해 탐구해 보겠다.
일본의 군주 천황, 실제 통치기는 200년 남짓
천황의 시작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일본의 초대 천황은 황조신의 후손인 진무 덴노로 지금의 미야자키현에 근거를 두다 형제들과 함께 긴키지역을 정벌해 그곳을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무 덴노를 포함해 9대 가이카 덴노까지는 일본 황실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증명하기 위한 신화적 성격의 서술로 보는 시각이 크다. (업적이 전혀 없는 2~9대 천황을 결사팔대라 부른다.) 실질적 중앙집권적 성격을 지닌 천황은 고훈 시대를 연 제10대 스진 덴노로 이 시기부터 야마토 정권이 일본 열도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보는 시각이 크다.
이후 나라 시대에는 중앙집권 통치 성격이 더욱 강해지며, 제40대 덴무 덴노 때에는 일본서기가 쓰이는 등 황실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천황의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들이 이어졌다. 이후 헤이안 초기까지 약 200년 동안 일본은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고대 중앙집권제 국가였다.
천황이 권력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56대 세이노 덴노 때부터였다. 외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요시후사의 후견으로 9살의 나이로 즉위한 세이노 덴노는 실권을 잡아보지도 못한 채 외할아버지인 요시후사를 섭정으로 임명해 그에게 정권을 넘겨버린다. 이때부터 후지와라 가문이 국정의 실권을 가지게 되며, 천황의 권력이 약해지고 섭정의 권한이 강해지는 이원적 정치제제가 등장한다.
한편으로 장자 계승 원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고대 일본 황실에서는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한 인세이(院政)라는 형태의 독특한 양위제도가 활성화된다. 이 제도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 72대 시라카와 덴노로 아들인 호라카와 덴노부터 증손자인 스토쿠 덴노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사를 그가 좌지우지했다.
인세이 제도로 시라카와 덴노가 후지와라를 견제하기 위해 타이라와 미나모토 가문을 계속해서 등용해 왔다. 섭정이었던 후지와라 가문은 가문의 내분과 타 가문의 등장으로 그 권세를 점점 잃기 시작하고, 조정 역시 내분 끝에 호겐의 난이라는 충돌을 겪으며, 무사 계급이 정치에 전면에 등장한다. 끝내 가마쿠라에 막부가 들어서며 일본은 황실의 조정과 무사 계급의 막부로 나뉘었고, 국정에 대한 실권은 무사 계급이 가져가게 되었다.
무사 정권과 황실의 몰락, 그리고 부활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가 시작되는 500년은 황실에 있어서 암흑기다. 특히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당시 천황이었던 고다이고 천황은 친정을 위해 겐무 신정(1333)을 단행하지만, 이에 반발한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묘 천황을 천황으로 세우며 조정은 교토의 북조(무로마치 막부), 요시노의 남조(고다이고 천황)로 나뉘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남조가 흡수 통일 된 이후에는 북조 출신의 천황가가 황위를 세습했다. 그러나 이 이후 황실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좋을 만큼 무너졌다. 무로마치 시대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지방 다이묘들이 황실을 습격해 황실의 땅을 빼앗거나, 긴키의 다이묘들이 황실을 무시하고 재정 지원을 하지 않는 등 어떻게 보면 하극상이라 할 수 있는 일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선대 천황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거나, 즉위한 천황이 수년 간 즉위식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요, 천황이 직접 어필을 써내다 파는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수준에 이른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막부가 황실을 지원하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사실상 쇼군의 통치 정통성을 승인해 주는 역할에 그치고, 실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막부의 통치에 반발한 조슈, 사쓰마 번 등 반막파 다이묘들이 들고일어나 왕정복고를 주장했고, 1868년 에도 막부가 천황에 실권을 반환하며 천황이 당시 일본 정치의 중심에 선 것처럼 보였다.
메이지에서 레이와로, 상징이 된 천황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제국이 된 일본의 최고 통수권자는 다름 아닌 천황이었다. 1889년 제정된 메이지 헌법(공식명 대일본제국 헌법) 제1조에서 일본제국이 천황이 통치하는 국가임을 확인하고, 제3조에 따라 천황의 신성불가침 원칙이 세워졌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 이후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천황의 존재를 대중이 인식하지 못했고, 천황이라는 것이 처음 정치 전면에 등장하자 일본 국민은 그가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메이지 천황은 재위 초기 지방을 돌며 국민들로 하여금 천황에 대한 존경심을 유발했고, 신도를 국가 신도로 발전시켜 천황 아래 모든 일본인이 한 국가의 일원으로서 인식하도록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슈번, 사쓰마번과 같은 번벌 인사에 의해 통치권력을 잡았기에 일본제국기 천황(메이지, 다이쇼, 쇼와) 역시 막부 시절처럼 그저 정치인들이 정해둔 정책을 승인하는 정도에 불과했다는 인식도 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의 경우 번벌정부의 입김이 약해진 집권 말기에는 적극적으로 정책을 폈고, 쇼와 천황 역시 군부의 전쟁 주도를 말리지 못하고 승인하는 형태로 국정에 관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천황의 지위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며 다시 변화를 겪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의 근원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 사회의 시스템이라 진단하고, 일본국 헌법을 통해 천황은 일본의 "상징"일 뿐,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세웠다(상징천황제). 국정에 관한 모든 권한은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수행하고 천황은 이를 "승인"하는데 그치도록 천황의 권력을 대폭 제한했다.
쇼와 천황은 패전 후 상징 천황으로써 메이지 천황이 그랬듯 전국 각지를 돌며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아닌 "일본국의 상징"의 이미지를 국민에 심었다. 그의 뒤를 이은 아키히토 천황(현재 상황)은 이를 넘어 전쟁의 참화를 반성하고 애도하며, 일본 국민에게 한층 더 다가가 상징 천황의 권위를 높였다. 전쟁을 반대하고 2차 대전에 대한 반성의 메시지를 자주 표명한 그는 21세기 이후 자민당계 내각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상징천황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아키히토 상황이 2016년 생전 퇴위를 선언함에 따라 2019년 그의 아들인 나루히토가 일본국 제126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즉위한 지 5년도 되지 않았지만 아키히토 상황이 쌓아놓은 상징 천황으로써 권위를 이어가고 있다. 꾸준히 지방 행사에 참석하고, 재해지에 방문해 국민을 위로하며 국민에 다가서는 황실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 황실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하다. 남성 후계가 매우 희귀해진 황실 내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여성 천황의 후손이 천황에 즉위하는 것)의 허용 여부, 여성 미야케(황계 가문) 창설 허용 여부, 황실에 대한 특혜 논란(결혼 지참금, 입학 특혜 등) 등이 있다. 더욱이 폐쇄적인 황실 문화를 얼마나 국민에게 개방할 수 있느냐, 국정 행위가 전혀 불가한 황실이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살아가는 것에 대한 황실 인권 논란도 거론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현행 헌법의 개헌까지는 아니더라도 황실 전범 등 기타 황실에 관한 법령이나 규정 등을 대폭 손질해야 개선될 수 있는 과제들이다. 앞으로 천황이 상징 천황으로써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남아갈지, 얼마나 국민에게 다가가 그들과 융화될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일본 황실이 해결해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