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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잼 Mar 16. 2023

귀멸의 칼날로 보는 근세·근대 일본

<귀멸의 칼날 : 환락의 거리>를 통하여


최근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의 새로운 극장판이 개봉했습니다. 이미 공개된 TVA 2기의 끝부분과 곧 방영 예정인 3기의 일부가 공개되었는데요. 저도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즐겨보고 있어 개봉된 작품을 본 건 물론, 곧 공개될 3기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 <귀멸의 칼날 : 환락의 거리> 편은 에도시대의 최대 규모 유곽인 '요시와라 유곽'을 배경으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본래 일본 작품명도 유곽 편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방송 심의 상의 문제로 환락의 거리로 의역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귀멸의 칼날 : 환락의 거리> 편을 통해 근세 말기와 근대 일본의 유곽, 하층민의 삶에 대해서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요시와라 유곽과 근세(에도시대) 일본


흔히 일본의 근세는 에도시대라 알려져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에도시대의 최대 규모의 유곽은 에도의 '요시와라 유곽'이었습니다. 특히 에도 막부가 세워질 때 여러 곳에 흩어져있던 유흥업소를 막부 주도로 한 곳에서 모아 놓은 곳이 요시와라 유곽이었습니다. 18세기 막부가 이 지역의 인구 조사를 했을 때 15세 이상 여성이 4,003명으로 이중 유녀는 절반 이상인 2,105명이었습니다.(wikipedia, 吉原遊廓) 당연하게도 요시와라 유곽은 일본 내 유곽 중 최대 규모를 가졌던 곳입니다.


요시와라 유곽의 지도(1846)


요시와라 유곽에는 다양한 가게와 유녀들이 존재했고, 이들 유녀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던 것은 오이란(花魁)이라는 유녀였습니다. 오이란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큰 거리에서 행렬을 보이기도 했고, 처음부터 면대면을 한다던가 하리미세라 하여 격자창이 있는 방에 앉아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꽃꽂이, 다도, 악기 연주 등 귀족 계층이 향유하던 문화를 익혀야 할 정도로 높은 교양 수준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란을 포함한 요시와라의 유녀들의 인생은 겉만 화려할 뿐, 속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과 달리 어린이나 여성에 대한 인권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일하는 유녀들은 대부분 유곽 내에서 태어난 아이거나 부모 혹은 타인에 의해 유곽에 팔려온 아이들로 충당되었습니다. 유곽에서 태어난 아이 중 여자는 유녀가 되고, 남자는 유곽 종업원이 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또한 하층민들의 경우 한식구라도 입을 줄이기 위해서 아이를 죽이는 경우도 성행했기 때문에(마비키, 間引き) 돈을 받고 아이를 파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유녀는 고용기간 동안 빚을 갚기 위해 일했습니다. 유곽 내에서의 식비, 치장비용, 방세, 질병 등의 휴무로 인한 손해는 모두 유녀의 빚으로 돌려졌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설령 가장 높은 계급인 오이란이 하더라도 유곽 내 가게에 발이 묶여 밑 빠진 물 붓기 마냥 청춘을 일만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요시와라의 유녀들(메이지 시대)


유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었습니다. 27살까지 일하고 28살에 낙적되는 방법, 빚을 자신 혹은 타인이 모두 갚는 방법, 죽는 방법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유녀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와 지는 방법이었습니다. 나이의 제한이 있는 직업인 만큼 28살을 즈음하여 가게에서 낙적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유녀로서의 가치가 없어져 추방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낙적한 이들은 반토신조로 후배 유녀를 육성하거나, 게이샤 혹은 가게의 호객꾼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유녀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우선 유녀의 구조 상 본인이 자신의 빚을 갚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이란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재산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스스로 빚을 갚을 수는 없었습니다. 미우케(身請け)라 하여 돈이 많은 손님이 유녀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첩이나 부인으로 데리러 가는 방법도 있었습니다만, 실제 유녀를 이용하는 비용에 비해 훨씬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이 역시 드물었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당연하지만 매우 비극적인 일이었습니다. 유녀의 평균 수명은 23세 전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업 특성상 매독과 같은 성병에 노출되기 쉽고,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가던가 하여 유곽의 규율을 어기면 심한 매질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이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성병이나 낙태 등으로 죽는 경우에는 멍석에 말아 강가나 유녀들만을 모시는 절 근처에 버려졌는데 바이다(売女)라 하여 매춘을 한 여자라는 표식을 단 채로 버려졌습니다.


이후 메이지 5년 유녀 해방령을 통해 가게와의 종속적인 관계는 벗어났고, 요시와라 유곽도 점점 쇠퇴했습니다. 귀멸의 칼날의 시대적 배경이 다이쇼 시대인만큼 요시와라 유곽의 시대와는 맞지 않는 설정입니다만, 애니메이션을 통해 요시와라의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특히 요시와라에서 태어난 아이들, 태어날 때부터 유곽의 종업원으로, 또는 유녀로 살아가야 하는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채, 인권 유린을 당하며 매우 짧은 생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막부 말기와 근대의 일본 하층민의 삶


에도시대가 되면 정치 구조(막번체제)의 영향으로 상업이 발달하게 됩니다. 무사들의 의식주를 상인을 통해 조달했기 때문에 상품 경제가 발달했습니다. 상품 경제가 발달하면 자연스레 경제 격차가 발생하게 됩니다. 특히 에도 시대에는 수확량의 3분의 2를 세금으로 내야 했기 때문에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中丹広域振興局)


하층민들의 삶은 점점 각박해졌습니다. 어떻게든 먹을 입을 줄여야 한다며 태어난 아이를 죽이는 마비키(間引き)라는 풍습이 유행했고, 유녀나 노예로 아이들이 유곽이나 다른 집으로 팔려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1700년대 이후가 되면 일본의 인구성장률은 거의 0%대를 유지할 만큼 이러한 풍습은 오래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도 시대에 도입된 유교사상은 일본인이 엄중한 경제 상황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도록 등 떠밀었습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근면과 검약 등의 사상이 통속도덕(通俗道徳)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일본인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이러한 통속도덕적 이념은 성실하게 일하고 평생을 아껴서 자신의 노력만으로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라는 사회적 시선으로 번졌고, 경제적으로 실패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적 질서와 무라, 마치, 번으로 나뉜 지역적 분단은 사라졌지만, 일본은 다시 새로운 분단을 맞이합니다.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타인을 밟고 넘어가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지도층 역시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 등 끊임없는 경쟁을 통해 지배 권력을 쟁탈하기에 이르렀고, 민간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직업,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시대와 분단의 형태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속도덕적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경쟁 사회에도 적용되어 성실히 공부하고 더욱더 절약해 저축하여 더 나은 삶을 살자는 방향으로 사회는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제적으로 실패한 하층민들 중 일부는 새로운 신흥종교(오 모 토교 등)를 만들거나 사회주의로의 변혁을 꿈꾸기도 하였습니다.(分断社会・日本)




지금까지 살펴본 에도시대의 유곽의 모습과 근세, 근대의 일본 하층민의 삶을 통하여, 현대 일본의 빈부격차와 정부를 향한 불신, 진영 간 대립은 사실상 근세, 근대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귀멸의 칼날 속 요괴들이 과거를 회상했던 것처럼 에도 시대, 근대 일본의 하층민들은 그들이 스스로 살아가기에 굉장히 가혹한 상황에 놓여있었으며, 더 나아가 정부와 사회는 이들을 향해 돈을 벌어라, 성실하게 일해라, 그래서 스스로 성공하여 스스로를 구하라라는 등 하층민을 향해 그들의 노력을 문제 삼아 방관하기만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모습은 현대 한국에도 투영 가능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노력을 강요받고 있고, 소득 없이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는 사람들을 향해 게으르다, 세금을 저런데 쓰지 말라며 서로를 적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 모두 복지 정책의 초점이 제한된 정책을 통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자립하고, 국가는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에서 수급을 받기 위해서는 오히려 수입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낳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근대로부터 시작된 이 뿌리 깊은 사회구조는 근면, 검약을 강조해 온 윤리관에 의해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하층민을 더욱 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소득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이유로 수급 자격을 취소하는 등 하층민들이 스스로 자립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놓고,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층민들에 대해 그들이 진정으로 자립하고, 위의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복지 정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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