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낭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by 잠실섹시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쓰던 때가 기억이 난다.

살면서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친구와 이별을 했다. 나는 그때 극심한 심적 불안감과 우울증에서 기인한 각종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우울증, 심각한 불면증, 그리고 '그놈의' 공황장애. 뿐만 아니라 아주 심각한 원형탈모까지 앓았던 때 크게 의지했던 여자친구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연애하던 대상과 보내는 시간만으로 온전하다고 생각해 친구들을 찾지 않았고, 그 애랑 노는 시간만으로 완전하게 재밌었다. 그리고 살면서 처음으로, 이 애라면 결혼을 해도 되겠다 라고, 아니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애는 마음이 따뜻했고 낭만을 아는 친구였다. 그리고 상황에 휩쓸리기 쉬운 20대 초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소신이 또렷했고 동시에 다름에 대해 고민하는 친구였다. 공감만을 받고 싶어하는 또래와는 달리 의심과 반론을 수용하며 고민을 주저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건강히 보낼 줄 알았으며, 본인의 감정을 타인에게 범람시키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지적으로 교감하는 대화가 이루어졌다. 방어적이지 않았고, 의심하지 않았으며, 표현에 주저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유복하고 화목한 집안에서 건강한 사랑을 받으며 잘 자란 아이'의 표본 같았다. 살면서 그렇게 편안한 연애를 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형편없기 짝이없는 계기로 그 애를 놓치고 연애를 놨다. 다시금 당시의 마음의 병을 앓으며 살고 싶지 않아서 내 삶을 살아내기 바빴다. 사실 무엇보다 다시는 그 애같은 친구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았고, 실제로 어떤 이성을 맞딱뜨려도 그 애와 비교가 되었다.


때 마침 당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다시 내 커리어와 삶의 성곽을 쌓기 위해 밤낮없이 일만 했다.

그렇게 살아오기를 벌써 5년차, 중간중간 몇번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고, 그런 만남이 거듭될수록, 날이 갈수록 사람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었다. 빼곡하게 나열된 일주일의 일상을 살아내기 바빠 인생에 '낭만'이라는 변수를 감내하기엔 피로가 앞섰고, 어쩌다 한번씩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관계로 시간을 베팅 하고싶지 않았다. 갈수록 편협한 사고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나는 모든 인간들을 나만의 방식대로 범주화 시켜놓고 각 유형별로 일반화를 서슴치 않았다. 모든게 다 뻔하게 느껴졌고 더 이상 새로운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 늙어가며 노총각 노처녀가 되는거겠지 싶었다.


그리고 낭만은 소리없이 찾아왔다.

어느 무더운 여름 날의 새벽,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수화기 넘어 '처음부터 좋아했고, 좋아한다'는 난데없는 한 아이의 고백에 철옹성같은 냉소를 두르고 있던 마음이, 겹겹이 쌓아두었던 감정의 장벽이, 마치 댐문이 열리듯 개방되어 그 통로를 따라 고여있던 감정의 물결이 쏟아지듯 온 몸의 신경으로 퍼졌다. 심장이 두근대서 터질 것 같았고 열병이 퍼진듯 관자놀이가 화끈댔다.


나는 어쩌면 지독하게 감정적이고 사랑에 목마른 스스로를 이 험난한 세상에서 지키기 위한 도구로 염세를 선택한 것이다. 그동안 나를 거쳐간 많은 관계들에게 무책임한 입술로 짖어댄 '사랑한다'는 말은 얼마나 역겨운 위선인지. '일단 만나다 보면 좋아지겠지'라는 말과는 대조적이게 타인의 문제부터 찾고자 하는 얄팍한 태도는 나를 지킬지언정 관계와 낭만을 지켜낼 수는 없었던 것. 냉소적인 감정이란 숨겨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의 동물적인 직관까지 잠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입으로 사랑한다 말하며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바빴고, 그녀는 그 텅빈 말에 잠시 가슴이 동할지언정 늘 불안에 떨었을 것. 그래서 나는 관계에 번번히 실패했던 것.


그러나 나는 그 애의 고백으로 나는 다시금 희망을 얻었다.

설레임과 새로운 낭만을 탐닉하기엔 너무 세상에 물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불안함을 가리기 위한 그늘이었다. 불안을 감수해야만 낭만을 누릴 수 있다. 내 삶의 철학. 작용과 반작용. 사랑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는 나이에 따라 차등지급되지 않는다. 낭만을 위한 과감한 결심.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LIVE WELL AND PROSPER'라면, 한살이라도 젊을때 멋진 모습으로 사랑을 영위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주신 내 존재의 이유에 다달으는 것. 그리고 모름지기 남자라면 늘 불확실성을 가까이 하며 동시에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려는 책임감을 탑재해야된다. 그래서 남자가 태생적으로 여자보다 더 무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에는, 나는 낭만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랑에 주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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