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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적인 성우 씨 Jun 05. 2019

연애시대_#3   "이제 진짜 밥 먹다 울지 않기"


나는 어릴 적부터 잘 울지 않았다. 삼남매 중 맏이여서 동생들 앞에서 운다는 게 왠지 창피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이 눈물을 보이는 것 자체를 꺼려해서 그랬는지, 여하튼 나는 잘 울지 않았다. 혹시 울더라도 아무도 없는 내 방에 나 혼자 있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이지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최루성 멜로’를 보고도, ‘사람이면’ 울 수밖에 없다는 이별이나 모정에 관한 영화를 보고도 나는 울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여기선 울 수밖에 없겠지?’라고 ‘울어라, 울어라’ 만든 듯한 영화를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혹시 보게 되더라도 ‘내가 우나 봐라’하는 마음으로 단단히 팔짱을 낀 채 보곤 했다.


그런 나를 알고 있기에 내 남동생은 신혼 초 남편에게, 우리 큰 누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참 정직한 놈이다.     




몇 해 전 남편과 함께 TV를 보며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직도 학교에서 급식을 먹지 않는 날은 굶는 아이들이 있다는, 생리대가 없어 신발 밑창으로 대신하는 소녀들이 있다는, 거처할 곳이 없어 쪽잠으로 지내는 청년들이 있다는 내용의 시사프로를 보게 되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세상에 밥을 굶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더니, 남편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도 졸업반 때 이틀 굶은 적 있었는데”        

                      

나는 처음 듣는 얘기에 놀라 근데 왜 얘기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가 졸업반 때라면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활황이었으며, 나는 내 친구들 중 가장 많은 연봉을 받을 때다. 우린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통화를 했었는데, 이런 비슷한 얘기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여전히 무신경하게,  

                       

“그런 걸 뭘 말해” 하며 계속 TV를 보며 밥을 먹었다.                 

             

스물여덟 나이의, 그 혈기왕성하던 때에,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돈이 없어 이틀을 꼬박 굶었다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내 남편이 아니라도, 그 허기진 청춘을 생각하니 그랬다. TV를 보며 밥을 먹던 남편이 놀라 허둥거리며 휴지를 들고 왔다.            

             

“20년이 다 된 일인데 왜 울어, 갑자기” 한다.          

“나한테 말하는 게 맘에 걸렸으면, 옆에 있는 친구 아무한테라도 잠깐 빌리면 됐잖아. 그 정도 융통성도 없어?”

                         

내 눈물은 어느새 민망함을 지나 짜증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남편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들 여섯 명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친척 어르신들이, 회사 동료의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적 없지 않았으나,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편과 나는 발인 전날 병원에서 친구들과 다 같이 밤을 지내고, 다음날 새벽 화장터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화장터에서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운구를 마치고, 우리는 아버님을 모실 공원묘지로 갔다. 공원묘지에서 친구는 아버님의 유골함을 나무 밑에 묻으며 울었다. 우리는 다 같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와 주차해둔 차를 가지고 집에 오니, 저녁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새벽부터의 일정으로 피곤하기도 하고, 뭘 해먹기도 귀찮아 우리는 라면을 끓여 마주 앉았다. 라면을 몇 젓가락 먹다가 남편이 말했다.  


“나중에 우리 중 누가 먼저 가서, 오늘처럼 보내주고 이렇게 혼자 라면 먹고 있으면.. 진짜 슬프겠다”

                           

갑자기 후드득 눈물이 쏟아졌다. 이번엔 나를 보던 남편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가 없는 우리는 누군가 먼저 죽고 나면, 오늘 같은 날 자식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빈 집으로 돌아와 혼자 라면을 먹고 있으면 정말 슬프겠다는 말을 담담히 하는 남편을 보니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라면을 먹다 말고 둘이 같이 울었다. 그러다 서로 머쓱해져 갱년기 핑계를 대며 투덜투덜 남은 라면을 먹었다.         



나는 결혼 전 남편에게 약속을 받았었다. 나보다는 오래 살기로. 내가 가고 나서 다른 예쁜 아줌마를 사귀든 말든 상관없으니 나보다 먼저 죽진 말라고. 남편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는 약속인 걸 알면서도 우린 몇 번이나 그렇게 약속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남겨지는 건 하기 싫었다. 이기적인 나는 남겨지기보단 내가 먼저 가고 싶었다.    

       

남편은 그때마다 말했었다.       

“걱정 마. 내 손으로 잘 보내주고 따라갈게”           


그렇게 정해져 있는 우리의 순서대로라면, 그 순서가 지켜진다면, 남편은 나를 보내고 빈 집에 돌아와 혼자 라면을 먹을 것이다. 오늘처럼, 지금처럼.           


나는 그다음 남편 친구들의 모임에서 이번엔 친구들에게 약속을 받았다. 내가 죽고 나면 내 남편을 빈집에 혼자 들어가게 하지 말라고. 누가 집으로 데려가든가, 아니면 우리 집으로 와 며칠은 함께 있어주라고. 처음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웃던 친구들이 라면 먹다 울었던 일을 얘기하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은, 지켜질까?           

                                  



대학병원에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으러 가는 우리는 여러 과의 진료를 한 날로 묶어 하루를 꼬박 병원에서 보내기도 한다. 얼마 전 둘이 함께 병원에 갔던 날은 아침 7시 반 채혈 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2시 50분까지 4개의 진료가 예약되어 있었다. 우리는 오전엔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냈으나, 오후엔 점심도 먹고 해서 운동 삼아 조금 걷기로 했다.         

                 

우리가 다니는 병원 2층엔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해 만든 걷기 코스가 있다. 우리는 그 코스를 걷다가 한 노부부와 마주쳤다. 뇌수술을 한 할머니는 휠체어에 타고 계셨는데, 모자를 쓰지 않아 머리에 꿰맨 자국과 실밥이 그대로 보였다. 한눈에 봐도 큰 수술을 하신 분 같았다. 링거액을 네 개나 달아놓은 링거대와 휠체어를 힘겹게 밀고 오시는 분은 할머니의 남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셨는데, 중풍으로 돌아가신 내 할머니와 똑같이 왼쪽 손은 가슴 한쪽에 대고 고정한 채, 왼쪽 다리를 가까스로 끌며, 남은 한쪽 팔과 다리로 휠체어를 밀고 계셨다.     

                     

남편과 나는 두 분이 편히 지나가시도록 벽 쪽으로 붙어 섰고, 할아버지는 한쪽 팔과 다리로만 천천히 휠체어를 밀며 지나가셨다. 우린 서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 모습은 생각보다 더 가까운 미래의 우리 모습일지도 모른다. 늙어간다는 건 참 쓸쓸해지는 일인 것 같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늘 흘려듣곤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나는 잠시 서서 그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남편이 내 손을 잡더니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나는 그날 저녁까지 그 노부부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의 노후는 어떨까. 이제 40대 중턱 왔을 뿐인데, 우리 부부 역시 꽤 여러 번 병원신세를 졌고, 크고 작은 수술을 했다.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할 때마다, 아주 희박한 경우의 수라는 걸 알면서도 그 무시무시한 동의서를 읽으며 나는, 정말 혼자가 되진 않을까 매번 두려웠었다.


자식이 있다한들 저 혼자 살아내는 것만도 힘겨운 세상임을 알고 있다. 그 작은 아이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기대려는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그 두려웠던 순간, 함께 손만 잡을 수 있었으면 그걸로 충분했을 텐데. 우리에겐 왜 같이 손잡아 줄 아이가 허락되지 않았을까.   

   

저녁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남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남편은 갑자기 우는 나를 보고, 이번에는  놀라지도 않고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            

“좋은 생각 많이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 돼. 걱정 마.”       

   

그리고 남편은 말했다.                

"이제 진짜 밥 먹다 울지 않기"              


어릴 적부터 다 커서까지도 잘 울지 않던 나는 그렇게 세 번, 밥을 먹다 울었다. 창피를 느낄 동생들이 옆에 없어서인지, 아니면 기질이란 게 나이가 들면서 바뀌기도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다행인 건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내 정서를 고스란히 이해하는 사람이, 때마다 곁에 있다는 것에 두고두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난번 건강검진에서 혈당이 경계 수준에 있다고 나온 남편은 두 달째 식이요법과 운동을 병행하며 그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오늘 아침, 공복 혈당 수치를 재던 남편이 나를 부르더니, “너도 한 번 재보자”라며 내 손가락을 알코올 솜으로 닦았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채혈침으로 찌른  순간, 아무리 손가락을 밀어 짜내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말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게, 진짜였어? 이런 냉혈한 같으니라고. 풉~ 크크”         

      

한 대 칠까 하다가, 밥 먹다 우는 것보단 이게 더 나와 어울린다는 생각에 함께 웃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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