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치는 일이 커리어가 될 때
달력을 넘기다 문득ㅡ
와! 벌써 새로운 명함을 갖게 된 지 어느덧 8개월?!
이력서 한 줄로 보면 ‘업무 적응 완료’라고 당당히 써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시간이고, 조직에서도 슬슬 1인분의 몫을 기대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요즘 내 마음속을 가장 자주 스치는 문장은 의외의 것이다.
“이미 8개월이나 됐는데, 왜 아직도 서투른 게 이렇게 많을까?”
여러 AI 를 활용해 머리를 싸매고 고군분투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했다. 알맞은 KOL을 골라 찾아가 제안을 해본다. 본인의 연구 분야는 혈액 바이오마커쪽이 아니라 ctDNA라면서 정중히 거절하시는데 죄송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결국 Oncology라는 큰 그림만 보고 클라이언트의 세부전공은 몰랐던 부분이라, 사실 그냥 무작정 덤빈 셈이었다는 걸 그 자리에서 얘기를 나눠보고서야 깨달았다.
제대로 공부를 못한거 같아서 나 자신에게는 조금 창피하고, 클라이언트의 시간을 뺏은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아직 8개월차 햇병아리 신입이라는 사실이 너무 또렷해져서 그날은 집에 오는 길이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이미’ 8개월. 이 단어는 외부의 시선과 같다. 15년 가까이 리테일 현장의 정점에서 매장을 진두지휘하던 베테랑에게 8개월은 시스템을 장악하기에 어쩌면 충분해 보이는 시간이다. 하지만 내 안의 감각은 ‘아직’에 머물러 있다. 직무도 직군도 바뀌었다 보니 매일이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과 같다. 익숙해진 만큼 더 또렷하게 보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부족함’이다.
원래 이 정도면 더 매끄럽게 해내야 하는 게 아닐까? 남들은 저만큼 앞서가는데, 나만 혼자 제자리걸음인 건 아닐까. ‘이미’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치와 ‘아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현실 사이에서, 나는 종종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엄격한 감독관이 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불편한 간극을 조금 다르게 정의해 보기로 한다. 8개월은 숙련의 시간이 아니라, ‘나만의 리듬’을 찾아가는 탐색기라고.
우리는 흔히 능숙해지는 것만을 ‘성장’이라 믿는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애초에 이런 자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느끼는 서투름과 불편함은, 사실 내가 이 일을 결코 대충 하고 싶지 않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잘 해내고 싶으니까 불안하고 불편한건데, 알면서도 사실 그 불안의 소용돌이 안에 있을때는 그게 가늠이 잘 안된다.
10년을 몸담았던 조직에서도 매일이 같지 않았고, 역동적인 리테일 현장에는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가 존재했다. 하물며 완전히 새로운 도메인에서 느끼는 이 생경함은, 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가장 정직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 더 느슨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하지만 성과는 낼 수 있도록 촉각은 곤두세우고.
‘빨리 능숙해져야 한다’는 압박 대신, ‘제대로 깊어지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자.
8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다. 외계어 같던 의학 용어들이 조금씩 입에 붙기 시작했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나만의 방식이 비즈니스의 문법에 조금씩 녹아들고 있다. 전혀 몰랐던 세계에 들어와서 이 거대한 세상에, 신기한게 이다지도 많은지 ㅡ 나날이 새롭다.
비록 그 보폭이 내가 기대한 ‘이미’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나는 ‘아직’이라는 시간 속에서 더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완성된 결과물보다 성장이라는 과정이 주는 이 서늘한 긴장감을 기꺼이 즐기려 한다. 8개월 차의 나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아마도 그건 지금 이 순간 가장 정상적인 상태일 것이기에.
오늘도 나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그 넓은 틈을 나만의 고유한 색깔로 채워 나가기로 했다.
언젠가 이 서투름이 누군가에게는 ‘제인'다운 방식으로 불리게 될 날을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