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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슬 Sep 19. 2024

카드값 결제일을 바꾸라니

4. 월세 내는 날 마저 바꾸라고?

추석 연휴가 꽤 길었다.

나는 갈 시댁도 없고 이혼 후 명절은 그저 푸욱 쉬는 날이었다.

올해 설까지만 하더라도 공휴일, 명절을 정말 애타게 기다렸다.

그 이유는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였다.


자격증 취득 후 처음으로 병원에 근무하게 된 곳은 직원들 바뀜으로 인해 직원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고 좀 더 큰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이직한 곳에선 원장 스트레스가 하늘로 치솟았다.

단순 일하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병원 문만 봐도 한숨이 나왔고 가슴이 답답했다.

감사하는 마음 가지기, 명상하기, 책 읽기 등등 마음 가짐을 바꾸려고 노력해도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건강까지 위협할 정도였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혼할 때보다 더 큰 스트레스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35살.

나보다 어린 여원장의 막말을 견디기 어려워 5월까지만 해야지 마음먹었는데 갑자기 폐업을 한다고 통보한다.

나야 일을 그만두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어찌 그렇게 딱 30일 전에 말하는 건지 생계가 달린 다른 선생님들은 엄청 당황해했다.

이곳을 인수한 새로운 원장이 100% 남은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더욱 황당한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권리금 받고 매도할 생각으로 병원을 차린 듯했고 직원들에게 전혀 미안해하거나 아쉬운 표정 따윈 없었다.

싸가지 없는년.


그동안 직원들에게 잘해줬다면 이런 욕도 하지 않을 텐데 이 글을 쓰고 그때 상황을 떠올리니 평온했던 내 정신이 다시금 혼란스럽고 심장이 마구 뛴다.






월급은 매달 10일이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일을 했고 출산 육아 기간을 빼더라도 사회생활 15년을 넘게 했는데 이렇게 월급을 늦게 주는 곳은 처음이었다.

면세점 근무할 때는 월급날 오전 9시에서 10시에는 항상 입금이 되었다.

특이하고도 특이한  흰머리 약국장이 운영하는 약국에서 근무할 때도 꼬박꼬박 월급은 잘 들어왔다.

오히려 돈 필요하면 며칠이라도 빨리 줄 수 있다며 필요하면 말하라고 할 정도였다.

어느 날 본인 opt카드에 문제가 생겼다며 점심시간에 현금다발을 들고 와서 늦지 않게 월급을 받기도 했었다.



첫 월급을 기다리던 몇 개월 전 10일 날.

이 병원에서는 저녁 6시가 돼도, 7시가 되어도 입금이 되지 않았다.

뭐 떼어먹진 않겠지만 황당했다.

황당했지만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당시 같이 일했던 치료실, 데스크 선생님들과 굉장히 친하게 지냈는데 그중 한 선생님이 너무 월급이 안 들어와서 원장에게 카톡을 보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렇게 월급을 늦게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매달 월급날에 이렇게 카톡을 보내지 않으면 월급이 안 들어왔다고 했다.

환자도 많고 돈이 없어서 못주는 그런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원장님 ~ 월급 언제 들어올까요? 저 월세도 내야 하고 카드값도 내야 해서요~"


"김쌤! 그럼 카드값 결제일을 바꾸세요!"

라는 답변이 돌아왔고.


"월세 내는 날은 바꿀 수가 없는데요?"

라고 받아치자,


"아 그렇네요."


라며 저녁 8시가 넘어 월급이 입금되었다고 한다.

그 덕에 나도 저녁 8시쯤 입금이 되었고, 나머지 선생님도 저녁 8시가 넘어 월급을 받게 되었다.




15년이 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늦은 월급입금은 처음이었고 이러한 원장 태도 또한 처음이었다.

갖가지 막말과 인성논란이 될 만한 태도까지 

가서 하나하나 말하고 싶었지만 자기 잘난 줄 알며 으스대는 사람에게 조그마한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그 원장 때문에 사람이 싫어졌다.

감정소비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병원에서 일하려면 새로운 직원들과 다시 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원장이 또 이런 사람일 까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모아논 돈도 있겠다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쉼이 필요했다.


사실 이혼 후 나는 쉰다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쉰다라는 것은 일하기 싫은, 도전하기 싫은 사람들의 핑곗거리라고만 생각했다.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직장에서 나와 6개월가량 집에서 쉬는 것을 보면서 

젊은 애가 왜 저리 쉬고만 있는 걸까 의아했다.

"언니 저 너무 힘들어서 쉬어야 해요. 마음 치료 중이에요."


사실 한 두 달만 쉬면 되지 무슨 6개월이 넘도록 쉬는 걸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내가 이렇게 당하고 나니 쉼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쉬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말을 체감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마냥 집에 있는 것은 못하는 스타일이라 병원일을 그만두고 지금 이 한의원에서 일하기 전 두 달가량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쿠팡 알바, 공장알바, 해외구매대행 등등 

항상 어떤 일인지 궁금해만 했는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여기서 일했던 에피소드도 하나씩 풀어갈 생각이다.



며칠 전 이 한의원에서 일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월급은 10시에 입금이 되었고 원장님이 카톡을 주셨다.



'한 달 동안 적응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항상 월급은 오전 중으로 보내드리는데 혹시나 점심시간 지나도 안 들어와 있으면 바로 말해주세요 지금까지 딱 한번 까먹은 적 있었어요 8년 동안~'



f감성 충만한 나는 이 카톡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일기에도 적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위해 수많은 경험을 했구나.

혹여나 이곳에서 서운한 일이 생기더라도 이 날을 기억하며 넘어가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자


연휴가 끝나가는 어제저녁 

내일 출근이라는 생각을 해도 전혀 싫지가 않았다.

신기하리만큼









폐업한 여의사는 서울에 다시 개원을 한다고 했다.

인간적으로 월급은 오전에...

늦어도 2시까지는 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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