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캐리어를 끄는 것을 보고 행선지를 알아차려, 몇 번이고 알림판을 확인하고 나서) 9 분 남았수다게. 혼저 왕 먹음성?
저는 아침을 많이 먹었어요.
기여? 경허도 먹잰?
하루는 집 근처 카페에 갔다가 <해녀의 부엌>이라고 쓰여진 브로슈어를 얻었다. 사진 속 해녀들은 말풍선으로 말했다. ‘바다는 우리에게 단지 부엌’. 젠더 역할을 극화하려는 인상이 조금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대담한 사실이었다. 그들이 연극을 펼치고, 요리하고, 해산물을 소개하고, 물질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매일 몸으로 돌파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해녀 분들도 연기에 동참하시는지 너무나 궁금했는데, 뚜벅이였던 나는 그날 연달아 늘어진 배차간격으로 지각해 초반 삼십 분 가량의 연극 무대를 놓치고 말았다. 해녀와 배우들이 뿔소라를 손에 들고서 이게 무엇인지, 어떻게 캐는지 소개하고 있을 때 입장할 수 있었다. 다 같이 둘러앉아 마을에서 직접 잡고 키우신 해산물과 채소로 식사를 하고 나자, ‘해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준비해 주신 해녀 할머님께서는 종달리 최고령 해녀 중 한 분이셨고 공연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레 직접적인 물질노동에서 벗어나신 상태였다. 비교적 제주어에 능한 배우 분께서 옆에서 웃다 얼굴이 붉어져, 틈틈이 자제를 시킬 정도로 과거 회상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이내 한 일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히 남는 기억인 ‘당시의 척박함’에 관해 관객들에게 들려주셨다.
전통적인 물옷은 본래 얇디얇아 체온 보호를 하나도 해줄 수 없었기에, 과거의 해녀들은 한 번 물질을 나가면 삼십 분마다 뭍으로 다시 올라왔다. 추위를 머금고 불턱(해녀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휴식하는 공간)에 모여들어 한두 시간 동안 몸을 덜덜 떨면서 그것을 삭여내고, 괜찮아지면 다시 입수하는 식으로 하루에 총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물질을 할까 말까였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혼자 글을 쓸 때의 장면을 겹쳐보며, 비참과 안도가 뒤섞인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글을 열심히 ‘하는’ 시간보다 고민하고 회피하거나 진정하는 시간이 매번 더 긴 것 같았다. 무언가를 쓰다, 이것이 어디까지 닿을지 알 수 없어 익사를 두려워하는 나. 잠수 자체를 꺼리는 나. 이미 들어온 상태에서 들어온 일을 후회하는 나. 영원히 나가고 싶지 않은 나. 나가야만 하는 나. 지나치다 싶도록 홀로인 나. 막상 글을 쓰고 난 다음도 문제였다. 글이 실패한다면? 글의 실패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그 시절이 지나고 그것만 고려되는 상황에서는 내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좌절감이 지속되었다. 일련의 상상도 좌절될 수 있는 세상. 이를 깨달을 때 나나 친구가 스스로 만들어 착용해 온 호흡 유지 장치는 힘을 잃고 그 자리에서 벗겨졌다.
(3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