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배우 분께서 옛날부터 이어진 물질의 행태를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보통 만삭에도 물질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까운 낚싯배 위에서 출산하는 일들이 잦았던 것. 깊은 바다로 입수를 시도하다 눈알이 튀어나와버리는 경우들. 돌고래가 해녀를 구해준 신화라든가 귀여움을 사는 동물로써 자주 얘기되지만, 단지 비닐봉지 한 장이라도 해녀가 바다 위의 무언가를 만나는 일은 공포 그 자체라는 것. 차가 없던 시절에는 다 같이 걸어서 출근하고 걸어서 퇴근하는 일이 가장 고된 일과 중 한 부분이었던 것. 일제강점기 전후에 원정 물질을 일본과 중국, 홍콩, 그 너머로까지 상당히 많이 나갔던 사실. 종달리 해녀 중 한 분께서는 열다섯 살 때 두 살 더 많았던 동료와 함께 원정 물질을 떠나셨다, 첫날 언니의 머리가 암초 사이에 끼어 밖으로 나오지 못한 일이 생기자 충격을 받아 전업을 결심하셨다. 물질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으셨다. 절대로 물질이 아니라 식모살이로라도 생계를 꾸리고자 하셨는데 그러고 나서 팔십 세가 될 때까지 해녀로 생활하셨다.
해녀는, 내가 아는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물적인 직업 같았다. 어쩌면 내 삶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보이지만 바로 그 점이 내게 안도를 주었다. 뛰어들어 가져오는 것. 자신의 동작만을 믿고 숨을 담보로 해야 시작할 수 있는 작업이란 그 참여부터가 손해에 가깝고, 손해를 메꾸려면 그의 뛰어든 삶, 하루를 가능한 한 어마어마한 양의 해산물에다 바치는 쪽이 바람직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과거의 해녀들은 막상 그렇지 않았고 그럴 수가 없었다.
종달리에서의 밤시간 내내 내가 들은 것들은 단지 조각에 불과했다. 이야기는 긴 시간에 관한 것이었고, 끝난 일이었다. 끝난 일에 대해 오랫동안 듣고 있자니 나는 홀로 애틋해졌는데 이제 누군가가 물질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적어도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는. 저녁식사를 마친 이 마을의 최고령 해녀는 여전히 관객들을 눈앞에 둔 채,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딱히 끝을 정해두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즈음 나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방랑자>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몇 분씩 보고 있었다. 영화의 소녀는 세상 속 일체의 부당함에 관계되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소녀 됨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제대로 갖춰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산골에서 방랑을 한다. 그러고 나서 죽는다. 소녀의 죽은 시체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작품은 사회적 사건을 다루는 르포타주의 분위기를 풍기고, 그녀를 목격했던 주변 어른들과의 진지한 인터뷰를 이어나가며 상황을 되짚어간다. 엄숙한 전개를 숨죽이며 따라다니던 나는, 며칠이 지나자 생각을 바꿨다. 결말을 이미 보았는데도 도통 소녀가 죽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난 감독이 답해줄 수 없는 문제이지만— 방랑하는 상드린 보네르의 연기는 생기가 넘치다 못해 관객의 마음을 압도한다. 바르다라면 은연중에 이것을 의도했을지 모른다. 현실적인 결말에 그렇지 못한 연기. 영화를 띄엄띄엄한 간격으로 주행한 나는 이제 다 본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주인공이 어떤 이유로 죽음에 이르렀던 건지 기억하려고 하니 나질 않았다. <해녀의 부엌>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걸 따라가던 중이었으니까 바로 그게 중요한데 각종 플롯을 곧잘 기억하는 내가, 아마 보다가 고통스러워 죽기 직전에 중단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영화를 재구매해서 다시 보았다. 집중해서 끝까지 보았다. 알고 보니 영화는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하다가 글로 쓰는 지금도 기억 속에서 희미할 뿐이다. 소녀 주인공이 어쩌다가 죽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