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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인 Jun 01. 2024

숲과 빛 II



 모두가 사랑하는 사려니숲길은 사람이 완전히 환영받는 곳이라는 느낌이 있다. 일자로 곧게 난 산책로 위를 가다 보면 마치 끝과 끝이 명확한 동화 속을 걸어가는 것 같다. 나무 군락의 구획이 정확해서 한 부분에 한 종류의 나무가 절대다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다. 사람을 해칠 수도 있을 것 같은 거친 원시림과는 달리 넓은 산책로가 주는 공간감을 따라 이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결심을 누구나 할 수 있고 갈 수 있다.



 몇 해 전 그곳에서 만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좀 위험한 상태에서 만났다. 둘 다 무언가에 의해 서울로부터 쫓기듯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나와 우연히 동행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와 그녀의 가족이. 해가 저물어 갈 즈음 내가 혼자 숲길을 가고 있는데 어머님께서 자기들이랑 같이 샛길로 가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어오셨다. 사려니의 평지길에서는 저어기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한두 사람의 형상을 오랫동안 직시해야 하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과 긴 시간 함께일 수 있다. 이 시간에 홀로 끝까지 가느니 자기네는 샛길을 이용해 승용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곧장 향할 건데, 동행하게 되면 주요 거점까지 태워주기도 하시겠다는 권유였다. 정식 루트는 한 시간 정도 남은 상태였다. 나의 완주 의욕은 작은 양초가 금세 녹아 꺼지듯 사그라들었다. 해가 지면서 눈앞 얼굴들의 화질이 낮아지는 것 같은 시야 때문이었는지. 또한 믿을 수 없는 길 위의 일가족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어쨌든 그 시간에 혼자 걷는 젊은 여성은 나뿐이었다. 다들 존재하다가도 자취를 감추는 시간을 잘 지키곤 하니까. 나는 그렇지 못하거나 않았고, 진이 빠진 상태에서 차를 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또다른 모험을 감행했다.



 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았다. 시작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 부모님들께서는 우리 곁으로부터 좀 떨어져 주었고, 언니와 나는 이상한 애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여기 있게 된 이유라며. 언니에게는 오기 직전 서울에서 현직 경찰인 애인에 의한 감금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주민이 112에 신고까지 했지만 결국 남자가 경찰이라는 사실로 인해 정의구현의 엄숙함이 스르르 소멸되었던. 내게는 그때 나의 집 주변으로 이사를 온 사람이 있었다. 헤어진 이후에. 그 일이 정말 ‘사이코패스’라고 느껴졌다. 내게 돌아와 달라고 하거나 잘 지내자고 하는 '요구' 모두, 그런 게 소통으로서 존재하는 거라면 소통이란 능력 내에서 가능한 사람을 죽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행위일까?



 이런 의심을 연속적으로 제기하게 될 때 우리는 매우 고생하고 있었다. 샛길로 간다는 것이 부차적인 길이 있는 게 아니라, 숲을 뚫고 가는 행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개울을 건널 줄은 몰랐다.—아주머니께서 이런 겁이 많구나, 라며 손을 잡아 주셨다. 나는 가방이 무거워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경사도 너무나 가팔랐다. 사려니가 험악했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어느새 등반다운 등반을 하고 있었다! 크롭 티셔츠와 트레이닝 팬츠를 입었던 나는 아웃도어 룩을 갖추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히 들었다. 한 번도 사본 적은 없지만 그러고 싶었다. 언니는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했다. 집으로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그래 맞아. 찾아올 수도 있는 위험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여기를 지나고 있다. 위기에 빠진 사람과 또 위기에 빠진 나는 모든 이야기를 탈탈 털어버릴 기세로 퍼부으며 숲길을 걸어갔다. 내가 처한 지금의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맞는 길로 맞는 사람들과 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언니의 불안한 이야기는 내 옆에서 계속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내내 걸어온 나는 당장 추운 바닥에 주저앉아 남겨져도 충분히 좋을 정도였는데 사실은 불안한 이야기에 기대어 모든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끝이 날 거라 기대하지 않다가, 우리 모두의 말수가 없어지고 정신이 흐린 와중 큼지막한 길 안내 이정표와 관광객들이 자리한 길로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아귀찜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차 뒷자리에서 언니의 꿈과 내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부모님들로부터 맞는 구석도 있지만 굳이 필요하지는 않은 조언을 들었다. 아귀찜 집에서는 비건 지향인이었던 언니와 나를 향한 날카로운 질문들이 오갔고, 걱정과 반박과 충돌의 끝에 제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아귀찜이 나왔다. 나는 한 조각 한 조각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느낄 정도로 맛있게 먹었다. 결국 동쪽 끝에 있던 나의 숙소까지 차로 데려다주시는 것으로 그날 우리의 동행은 마무리 되었다.



(3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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