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집과 정의연에 질문을 멈췄다.

도대체 난 할머니를 위한다고 뭘 하기는 하였는가?

by 김지혜

난 사회적으로 아픈 사람을 대변하기 위해 삶을 사는 사회 활동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따라 몇 년 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계신 곳,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처음 가는 그날, 역사적 증언을 하신 할머니를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찼다.

할머니와 인증샷도 찍어야지 생각했다.

나눔의 집에 도착하자 마치 시집간 딸이라도 온 거 마냥 할머니들께서는 그 친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할머니를 뵈면 우울하고 슬프고 화난 표정으로 계시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나의 상상은 뉴스나 티브이에서 보아온 증언과 시위의 현장의 할머니만을 상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냥 여느 할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이 드셨고 연로해 보이셨다.

난 할머니들이 드실 수박과 몇 가지 간식거리를 가져갔다.

아주 작게 조각조각 나눠진 수박 몇 조각을 일하시는 분이 할머니 드시게 가지고 왔지만 함께 있는 우리에게는 주지 않았다.

난 내가 사간 수박을 모두가 같이 툭 잘라 웃으며 나눠 먹을 거라는 상상을 했었다.

친구는 할머니들이 드실 수 있는 뻥튀기를 한 아름 사서 할머니들과 나눠 먹었다.

우리가 할머니와 나눠 먹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건 그 뻥튀기였다.

역시 오랫동안 꾸준히 방문한 친구의 멋진 노하우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봉사할 방법을 찾으려 나눔의 집 홈페이지를 살펴보았다.

나눔의 집 역사관에 영어 도슨트 봉사 과정이라는 게 있었다.

1년에 한 번 봉사자를 선정하고 역사관에 대한 교육 이후 도슨트 봉사자로 활동할 수 있다.

도슨트 봉사를 하기 위한 자격은 매월 3만 원의 기부금을 1년간 내야 하고 면접도 봐야 한다.

외국인을 상대로 질문에 대응하고 부정적인 질문이나, 잔인한 만행의 증언에 대한 설명에 견뎌 낼 수 있어야 하기에 면접은 대부분 오랜 기간 봉사를 해온 외국인 봉사자가 진행했다.

역사관 도슨트로 꾸준히 봉사를 해온 봉사자는 한국인이 아니라 캐나다인과 미국인이었다.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봉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면접을 보는 그날 정말 제대로 공부해서 한국인으로서 이 사실을 널리 알리는 도슨트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에 한번 토요일 교육을 참여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왕복 두시간이 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거의 토요일 종일토록 초등생인 아이들은 혼자 지내야 했다.

나는 봉사 때마다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었다.

그 친구의 아이들처럼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좀 더 할머니에게 웃음을 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단 한 번이라도 만난다면 분명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기억을 간직 할 것이다.

책에서 본 것과 내가 직접 할머니를 만나본 적이 있다는 건 엄청난 차이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이 문제를 접한다면 아마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알아버린 사실은 관심을 끊기가 힘들다.

내가 기대했던 건 아이들과 함께 나눔의 집에 오고 가며 강요하거나 설명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당장 관심이 없어도 좋다. 분명 내 아이들은 할머니를 만나지 못한 친구들보다, 나눔의 집에 가본 적 없는 친구들보다 언젠가는 더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도 욕하지 않고 누구를 탓하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해보고 찾아보고 알아보는 첫걸음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어느 날 난 아이들을 데려갔다. 친구의 뻥튀기를 생각하며 할머니와 나눠 먹을 하트 모양의 뻥튀기를 아이들과 샀다.

교육을 마치고 할머니를 뵐 수 있는지 여쭤 보았다. 아이들이 할머니를 뵙고 뻥튀기를 나눠먹으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관계자는 우리를 할머니가 계신 건물에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90이 넘은 할머니가 계시고, 누워 계시는 할머니들에게 우리같이 외부인은 쉽게 병을 옮길 수도 있다.

아쉬웠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할머니 드리려 사 왔다고 뻥튀기만 전달드렸다. 허접한 물품에 손이 부끄러웠지만 아이들이 희망에 부풀어 샀던 것을 그냥 되가져 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과 집으로 가기 전 할머니들이 계시는 곳을 바라보자 한 할머니가 창밖에 있는 우리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손을 흔드셨다.

아이들도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쉽지만 그렇게 라도 할머님을 뵐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때 김구라가 도착해서 할머니께 가고 있었다.

그는 마치 퍼스트클라스의 승객처럼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며 할머니가 계신 공간으로 직행했다.

우리는 연예인을 본다는 생각에 들어가지도 못한 것에 대한 억울함은 뒤로하고 김구라와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렸다.

할머니를 뵙지 못한 서운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김구라와 인증숏을 찍고 싶은 생각만 가득해진 아이들.

난 일반인이라 들어갈 수 없는 할머니의 공간에 연예인은 들어갈 수 있구나.

차별받은 느낌이었다.


나눔의 집 홈피에는 후원한 사람과 후원 물품에 대한 공지를 매일 해준다.

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알려준다. 내가 처음 친구와 수박과 과자를 사 갔을 때 그곳에 공지를 보고 후원한 내가 약간 으쓱했다.

그날 홈피에는 김구라가 사 온 먹음직스러운 복숭아 상자 사진이 올라가 있었다.


이런저런 마음이 들었지만 난 1년간후원을 하며 몇 차례 도슨트 교육을 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은 할머니의 증언을 통역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속하지 못했다.

난 아이들과 함께 봉사를 하고 싶었지만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따라온 아이들은 실망하고 다시는 함께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결국 난 봉사다운 봉사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월 3만 원이라는 기부를 1년간 하고 그만두었다.


이후 정의연에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학생들을 상대로 토론을 진행하는 강사 과정을 지원했다.

내 아이만이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도 이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난 나눔의 집에서 약간의 봉사와 박물관 과정 교육을 통해 이미 조금 알고 있지 않은가?

정의연의 첫 오픈 수업을 참여했다.

내가 아무 개념 없이 이 과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약간 보여 주고 싶었다.

첫 번째 강연을 듣고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이내 그곳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눔의 집 봉사 교육을 들은 이력도 은근슬쩍 자랑처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눔의 집과 관련성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독립적인 서로 별개의 조직같이 느껴졌다.

이런 저런게 궁금했지만 몇가지 질문에 대한 속시원한 답을 받지 못했다. 더 묻지도 않았다.


나에게 그 두조직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이 계신 곳으로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 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뭔가 별개의 조직으로 나와같은 혼돈된 질문과 인식에는 깔끔한 답을 주지 못하는 듯 했다.

정의연에 교육을 받으러 갈 때마다 나의 궁금증은 커져갔다.

왜 할머니들이 함께 있지 않고 이렇게 따로 계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정의연에 계시던 두분의 할머니 중 김복동 할머니께서 별세하지고 길원옥 할머니 혼자 계신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무리 잘 보살펴도 혼자 계시는 할머니 보다는 할머님들이 함께 계시면 덜 적적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또 다른 의문점은 정의연 옆에 박물관이 또 있다는 것이다.

왜 박물관 건립에 두 조직이 돈을 따로 쓰는 걸까? 같이 만들면 할머니들의 유품과 증언과 자료들을 한 번에 더 많이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정의연과 나눔의 집은 각각 할머니를 따로 모시고 따로 후원과 지원을 받고,

각각 박물관을 지어서 입장료를 받으며 각 할머니에 관련한 증언과 자료를 따로 보존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의 세속적 생각으로 마치 똑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두 기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던 난 거기서 멈추었다.

이런 의심을 자꾸 하는 내가 아직 봉사정신이 부족해서, 내가 계산적이어서 그런거겠지 여겼다.

그리고는 그 어떤 것도 의심에서 의문으로 그리고 질문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상하다, 기분이 별로다”에서 멈춰 버린 나의 관심이 결국 여러 의구심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누군가도 아주 약간만이라도 ‘이상하다’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어느 순간 뭔가 정의할 수 없는 의구심과 기분이 약간씩 나빠지는 상황,

그런 상황에 놓이고 나면 봉사라는 이름의 활동은 참 쉽게도 멈출 수 있게 된다.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 그리고 도슨트 교육과 봉사를 하러 갔을 때도 대부분 사람들은 선물과 후원품을 가지고 온다. 그런 후원품들은 매번 웹사이트에 올라간다.

그런 물품을 사진을 보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나이가 드셔서 제대로 드실 수 있는 것도 없을 것 같고, 제대로 쓸 수 있는 용품도 아닐 것 같았다.

그때 저건 다 누가 가져갈까, 누가 먹을까 어떻게 처리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그냥 직원들이 알아서 나눠 쓰겠거니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나눔의 집 직원들의 고발을 보고 그런 오해를 받아 왔을 그들에게 미안했다.

그때 할머니가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 때마저도 난 왜 할머니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곳에 갇혀 있는 기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볼 수 있지 않았나?

정의연과 나눔의 집은 각자의 비즈니스를 한다고 느꼈지만 왜 다른 봉사자나 친구와 나의 의구심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 나눌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까?

내가 던진 질문들에 속시원한 대답을 받지 못했다면 왜 이해가 안 된다고 더 설명해달라고 되묻지 않았는가?


난 내 안에 있었던 질문과 의심을 그냥 묻어두고 어떤 질문도 내어 놓지 않았다.

그곳에는 상처받은 할머님들이 계시는 곳인데 말이다.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가 중요하다고 말해왔지만 난 따져 묻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는 아이들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부모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되고 그 곳에 누군가와 만난 적 있는 아이들이 나에게 질문한다면 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몇 푼 안되는 돈으로 큰 의미를 두며 기부하고 생색내고 의심하고 또 후회 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도대체 난 할머니를 위한다고 뭘 하기는 하였는가?

난 나눔의 집과 정의연, 그곳에 할머니가 계신다고 진정 생각하기는 한 것일까?


https://blog.naver.com/janekimjh/22151362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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