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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Jan 07. 2019

15. 그들이 잘 살길 바라지 않는다

형편없는 나의 수준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는 하루하루가 신나고 재미있었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절, 그저 하루 종일 같이 놀 친구들이 있고 저녁이 되면 돌아갈 집만 있으면 모든 게 행복했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행복이 뭐냐고 굳이 묻지 않아도 될 만큼 일상이 행복이었다.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간 같은 반 남자아이의 집에 갔을 때에도 , 대문에서 현관문까지 돌계단을 걸어가야 하는 걸 보며 잠깐 와~ 했지 우리 집과 비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돈이 주는 영향력에 대해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돈 대신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는 4학년부터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을 뽑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우리 학교에서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이 되는 선배들은 공부를 잘했고, 예쁘거나 잘 생겼으며, 부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기준이 어디서 탄생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이스카웃이나 걸스카웃이 되면 공식적으로 다방면으로 우수하다는 걸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흐린 갈색 유니폼과 베레모 모자를 쓰고 하얀 스타킹을 신은 모습은 나의 눈엔 선택받은 모범생이었다.  4학년 초반이 되자 우리 반에도 다섯 명 내외로 걸스카웃 후보를 뽑았다. 초등학교 때 공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 말처럼, 나도 공부는 잘했고 그에 따라 나도 그 후보군 안에 들어 교단 위에 잠깐 서 있었다.


퇴근한 엄마에게 걸스카웃 후보에 올랐다고 하자, 엄마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단복 사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  아냐고. 그런 거 살 돈 없다며 아주 단호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맞벌이로 겨우겨우 살고 있는데 그런 데에 돈을 쓸 수가 없는 걸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걸스카웃이 되면 사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엄마는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왔으니까.  


다음날 학교에 갔는데 우리 반 걸스카웃 인원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그 인원에 없었으며, 어제 교단에 서 있지 않았던 친구가 걸스카웃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는 무척 자랑스러운 듯이 발간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그 아이와는 친한 편이었고 집도 왕래하던 사이였다. 나는 그 아이의 성적이 낮다는 것과 집에 돈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 그 아이가 임원 같은 걸 뽑을 때면 부모님이 학교에 오고 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학급 임원에는 뽑히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아이가 걸스카웃이 된 것이다.  아이들은 어제 교단에 없던 애가 갑자기 걸스카웃이 된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고, 돈 먹였네 하며 떠들다가 하더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걸스카웃 단복을 입고 자랑스럽게 돌아다녔다. 그러고 나서 보니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이 된 아이들 중 공부는 못해도 집에 돈이 많거나, 부지런히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도 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따위 기준의 뒷면에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라고 치부했고 공정한 룰은 애초에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 형편이 좋지 않다는 걸 느낀 후로, 나는 가정형편을 친구들에게 숨겼다. 돈이 없는데 떡볶이 집을 가자고 하면 집에 일찍 가야 한다고 갔으며, 사준다고 같이 먹자고 할 때에도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자존심이 상해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먼저 가버렸다. TV에 빠져든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런 구질구질한 현실을 회피할 수 있고 행복한 것만 볼 수 있었으니까. 드라마에서 나오는 부잣집을 보고 난 후부터, 나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어릴 때 갔던 그 친구네 대문과 현관까지의 거리를 가상으로 내 눈 앞에 만든 것이다. 우리 집은 아스팔트로 길게 난 평평한 어린이 보호구역을 지나 양옥집들이 줄줄이 서있는 오르막길을 지나 또 한 번의 오르막길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 있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지점 한쪽에 전봇대가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핀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전봇대에 붙어있는 가상의 벨을 눌렀다. 그리고 한참 있다 대답한다 "나." 그러면 내 눈에만 보이는 커다랗고 육중한 대문이 지잉~ 소리를 내며 열린다. 나는 대문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올라간다. 그 짧은, 5분도 안 되는 오르막길을 걸을 때만큼은 부잣집 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중학생이 되자 빈부의 차이를 대놓고 말하는 선생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학년 초 가정환경 조사시간에 아빠가 교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은 은근슬쩍 돈을 가져오라고 흘렸다. 당시에는 촌지가 흔했는데, 시골에서 교사를 하다 올라온 아빠는 이곳 서울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는 게 자랑이라는 듯 돈봉투가 바닥에 깔려있는 사과박스를 문밖으로 내던지는 사람이었다. 모두 다 받는데 왜 안 받냐며 그 돈들만 챙겨도 벌써 집을 샀을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엄마에게 아빠는 선비처럼 표표히 앉아서 상대도 하지 않았다. 우리 아빠 같은 교사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몸소 느낀 것이다.


나는 반에서 못 해도 10등 안에는 꾸준히 들었는데, 어느 저녁 엄마에게 반장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개교기념일이라며 10등 안에 드는 아이들끼리 돈을 걷어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는 학교를 도와주자는 거였다. 많으면 많은 돈이고 적으면 적다고 할 수 있는 액수였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아니, 엄마에게는 정말 커다란 부담이었기에 못 낸다며 죄송하다고 하는 걸 들었다. 나는 너무 속상해서 밤새 울었다. 돈을 걷자는 반장 엄마도 미웠고, 그 돈을 못 내겠다는 엄마도 미웠다. 무엇보다 이제 막 초등학교 때의 기억을 잊고 새로 자라나려고 하는 내 자존심이 상처 입어서 무척이나 분했다.  


어쨌든 행사가 끝나고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돈을 낸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한 뒤 학교 배지 모양이 들어간 금색의 티스푼과 포크 몇 개가 들어있는 기념품 상자를 나눠줬다. 당연히 난 대상이 아니었기에 가방을 싸고 있었다.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렸다. 선생님은 빨리 나오라고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 딴에는 정말 크게 용기를 내서 착오가 있는 것 같다며, 엄마가 돈을 안 냈다고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들을까 눈치를 보며 말씀드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인상을 팍 쓰면서 엄마가 정해진 금액의 4분의 1을 냈다며 받아가라는 거였다. 마치, 그 금액을 냈다는 걸 부끄럽게 알라며, 그 돈을 받고 주는 게 짜증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주는 거라는 눈빛으로 혀를 차며 나를 아래위로 쳐다봤다. 지금 생각해도 그 선생님은 정말 심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퇴근한 엄마에게 따졌다. 엄마는 내가 너무 속상해해서 최선을 다해 마련한 돈을 하얀 봉투에 넣어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하면서 건넸다고 했다. 나의 자존심은 바닥으로 더 떨어져 버렸다.


프리랜서를 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나의 일도 성수기가 있고 비수기가 있다. 성수기에 번 돈으로 비수기를 살아야 하고 독립해서 사는 처지이니 소액 적금이나 보험료를 빼고는 쉽게 돈을 모을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물론, 나와 같은 상황에서도 부지런히 모아 전세금 정도는 모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의 상처 때문인지 돈으로 보상받고 싶어 한다. 돈을 모아 여행을 가기도 하고,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쓸데없는 물건을 사기도 했다. 또, 필요하지도 않은 데도 고가의 화장품만 썼다. 그래야 잠깐이라도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서울에 내려오기 전까지 나는 이 패턴을 반복했다.


물론, 하고 싶은 걸 다 했으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항상 붕 떠있는 불안함은 계속되었다. 마흔 살이 되어서야 그따위 짓이 나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땅에 발을 딛고 아주 잘 서 있다.  


몇 년 전, 오랜만에 통화했던 친구로부터 의문스러운 방식으로 걸스카웃이 되었던 그 아이의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스펙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회사를 '백'으로 들어갔으며, 거기에서 결혼을 잘하려고 남자를 꼬시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가 성공했는지 여부는 모른다. 다만, 그 아이가 실패의 쓴 맛을 잠깐이라도 맛보기를 바란다.  


또 훨씬 몇 년 전에는 다니던 중학교 근처를 걸어가다 나의 자존심을 바닥으로 밀어내렸던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여전히 인상 쓰고 있는 얼굴로 그대로 늙어있었으며 잠깐 앞을 볼뿐 아래를 보며 걷고 있었다. 동창들을 통해 여전히 교사라고 들었는데 학생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앞을 보지 않는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만든 나의 시선에는 똑바로 앞도 못 보고 사는 그의 인생이 우스워 보였고, 그가 계속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


나도 안다. 아직도 마음의 수양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지만, 이제 겨우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했을 뿐이니, 이 정도의 저주는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내가 저주했다는 기억도 안 날 만큼 까마득하게 잊을 날이 오겠지. 그러나, 문득문득 이렇게 생각나는 날에는 그들이 행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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