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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Jul 09. 2022

우리는 고릴라 꿈을 꾼다.

그림책을 읽어본다 12: <고릴라>(Gorilla)

<고릴라>(Gorilla)       Anthony Browne     1983      Walker Books


안쏘니 브라운(Anthony Browne)의 <고릴라>에는 빨간색이 많이 보인다. 주인공인 어린 소녀 한나가 여러 가지 빨간색 옷을 입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꿈과 기도 사이에 등장하는 고릴라도 빨간색 물방울무늬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다.   


빨간색은 특별한 색도 아니고 아이들이 입은 빨간색은 더구나 눈에 뜨이지 않는다. 명랑한 색을 많이 사용하는 안쏘니 브라운의 그림에서는 빨강은 그의 활발한 스토리텔링의 일부라고 무심히 넘길 수 있다.

그래서,

<고릴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주욱 읽고 나면 , '아, 일상에 시달리는 지친 아빠와 덕분에 혼자 남겨진 딸 한나가 드디어 딸의 소원대로 고릴라를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구나, ' '그러니 되었다. 해피엔딩' 하고 책을 덮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읽기에서 흐릿하게 생각 뒤쪽에 남는 물음표의 느낌이 있다.


웬 빨강이 이렇게 …


<고릴라>의 일독에서 흐릿하게 느끼기 시작하는 물음표, 이야기의 정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무엇보다,

단순하고

직설적인

원래의

피가 흐르는   

(인간) 관계를 들 수 있다.

빨강의 활기이며 인간이 잊어버려가는 원래의 모습을 가리킨다.


하지만 역시 빨강은 너무 익숙한 색깔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흐릿하게 느낀다. 단지, 한번 의식하고 나면 눈에 밟히는 색깔이 된다.


우선

이야기의 시작, 책의 바로 첫째 펼침에서 한나가 고릴라를 좋아하고 동물원에 보러 가고 싶어 한다는 글이 있다. 거기에 붙여 아빠와 한나의 아침 식사 풍경이 등장한다.

거기에 힌트가 많다.


첫 느낌은 식탁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이다.

무심함, 차가움, 활기 없음으로밖에는 읽을 방법이 없다.


어떻게?

1. 부엌의 싱크대와 벽장이 반듯하게 각진 모양새로 앉았다. 그릇이나 살림살이는 보이지 않는다. 색은 연한 살색과 희미한 푸른색의 조합이다. 그 앞으로 식탁에 아빠가 자리하고 있다.

2. 아빠는 한나를, 독자를 마주하고 있다. 넥타이까지 맨 출근 복장으로 아빠는 눈을 내리깔고 펼쳐 든 신문을 보고 있다. 아빠의 연한 금발과 얼굴색마저 뒤 배경의 활기 없는 살색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3. 부엌 바닥은 검정과 흰색이 교차로 배열된 큰 타일 무늬로 되어 있다.

4. 아빠 앞으로 크게 펼쳐진 테이블 역시 같은 흐린 살색이고 그 위에 몇 가지 흩어져 놓인 물건-시리얼 박스, 그릇까지 연한 블루와 살색의 조합이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침의 활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아빠를 마주하고 앉은 한나가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있다. 한나는 독자를 등지고 앉아 있으므로 그 얼굴은 볼 수 없다. 단지 그 빨간색의 조그만 몸집이 무언가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리고

한나의 빨강 질문에 곁들여, 그녀가 활기 없는 이런 분위기에 포기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메시지가 숨어있는 곳이 있다.

안쏘니 브라운의 서명 같은 그림 힌트 조크다.


아빠가 펼쳐 든 신문.

그림의 배열 상 그 신문이 페이지의 정 중앙에 위치해있고 거뭇거뭇하게 보이는 글자와 사진을 볼 수 있다. 글은 읽어지지 않지만 사진은 흐릿하게 보인다. 모두 고릴라다.

아빠는 고릴라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이다.   

한나의 고릴라 사랑은 단조로운 일상에 묶인 아빠를 피가 도는 사람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그녀의 의지와 다름없다.

그래서 이 흐릿하고 차가운 아침 식탁 풍경에 한나는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발칙하게 아빠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얼굴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심상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딸은 아빠에게 고릴라 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당신은 어쩔 수없이 나의 뜻에 따르게 될 것이오’라는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 줄거리 속의 한나는 발칙하지 않다. 아빠에게 여러 번 동물원 행을 간청할 뿐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표정은 소심한 아이의 얼굴이다.


작은 소망의 힘은 강하다.  


한나의 식탁 장면은 이야기의 후반부에 다시, 다른 색으로 되풀이된다.

고릴라를 보고 싶어 하던 한나가 꿈에서 고릴라를 만나 같이 동물원에 놀러 가고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이번엔 어떤 식탁 장면인가?

고릴라는 한나와 독자를 향해 앉아 있다.

1. 뒷 배경은 빨강 체리 무늬가 촘촘히 박힌 노랑 벽지.

2. 고릴라는 빨간색 물방울무늬의 나비넥타이를 매고 바나나를 먹고 있다.

3. 식탁은 붉은색 체크무늬 식탁보에 딸기 파이와 체리 파이, 바바나와 아이스크림, 붉은 토마토가 곁들여진 햄버거로 그득하다. 또 붉은 케첩 병과 그리고 붉은색 머그도 보인다.


고릴라 앞에 앉은, 역시 얼굴은 보이지 않는 한나는 이번에는 노란색 스웨터 차림이다. 고릴라가 먹고 있는 바나나의 활기에 동의하고 있음이다.

한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발칙한" 한나는 결국 성공한다.

생일날 아침.

자신의 고릴라 꿈을 이야기해주기 위해 눈을 뜨자 말자 아빠에게 달려간 한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릴라 장식의 케이크와 고릴라 카드다. 아빠는 동물원에 고릴라를 보러 가자고 한다.


아빠는 더 이상 핏기 없고 무심하지 않다.

아빠는 청바지 위에 빨강 스웨터를 입고 있다.

그리고 아빠는 청바지 뒷주머니에 노랑 바나나 한송이를 꽃아 넣고 있다.  


어젯밤에 고릴라가 아빠의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아빠도 같은 고릴라 꿈을 꾸었던 것이었나?




본 글의 내용과 사진 이미지는 저작자의 허락 없이는 어떤 형태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22 Jane. (삽화 Copyright 2022 m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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