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게 보내는 편지
그날 방 안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있었다.
방 안은 이미 한 달 이상을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한 할아버지의 거친 숨소리와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쾌쾌한 숨 냄새로 가득했다.
모두들 말 한 마디 없었으나 우리는 직감적으로 할아버지가 곧 임종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끊어질 것 같은 거친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에게도 마치 호흡곤란이 올 것만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하는 생명체의 모습, 94년이라는 질긴 세월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는 듯 죽음 앞에 선 할아버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오가는 말 한 마디 없이 뼈가 모두 드러난 할아버지의 손을 잡거나 앙상해진 두 발을 감싸 쥐고 있을 뿐.
요란한 시계추 소리가 귓가를 찌를 듯 파고들었다.
사람이 죽는 순간 신체의 모든 구멍에서 액체가 흘러나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듣기 버거울 정도로 거칠어졌을 때, 아빠는 나에게 얼른 약국에 가서 솜뭉치를 사오라고 했다.
집 밖을 급하게 뛰어나갔는데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렸다.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진 벚꽃 잎이 아직 이렇게나 많은데,
이제 막 추운 겨울이 지나고 초록을 가득 품은 생명들이 터질 듯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비를 맞은 것처럼, 할아버지의 죽음은 갑작스런 소나기처럼 찾아왔다.
참을 수 없는 불안이 찾아왔다. 그것은,
어린 시절 엄마에게 혼나고 숨어들던 할아버지의 품 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상실감보다 훨씬 더 컸다.
키가 커지고 머리가 자라게 되면서, 귀가 먹고 쇠약해진 할아버지를 멀리하고
기억이 불완전한 할아버지가 이상한 질문들을 늘어놓을 때마다 방문을 굳게 닫아버렸던 지난 날들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의 잔여물들이 빗방울에 섞여 후두둑 떨어졌다.
나는 약국에 갈 수 없었다.
비를 흠뻑 맞았으나, 솜을 사는 일보다 얼른 집으로 들어가 할아버지에게 말해야 했다.
미안해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짜디짠 빗물이 볼을 타고 입으로 흘러 들어왔다.
7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의 거친 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아파트 단지에 구급차가 들어왔고, 주황색 침대가 내려졌다.
할아버지를 싣고 갈 침대가, 막 소나기를 뱉어 낸 하늘 아래에서 더욱 진한 주황빛을 띄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오후 한 때 소나기와 함께 사라졌다.
엄마에게 혼이 나고 입을 삐죽거리며 할아버지의 주름진 품 안으로 파고들던 천진함으로 살았더라면 할아버지는 좀 더 행복하게 하늘로 올라갔을까.
믹스커피를 그토록 좋아했던 할아버지가 방금 마신 커피를 잊어버리고 나에게 커피를 달라고 부탁했을 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커피 잔을 내어드렸다면, 한 줌의 미련이라도 덜어낸 채 세상을 떠날 수 있었을까.
그 후로 소나기가 내릴 때마다 내 마음속에도 비가 내린다.
마음속에 내리는 빗줄기가 어찌나 차고 센지
아무리 우산을 쓰고 피하려 해도 온몸이 다 젖어버린다.
화창했던 하늘에 난데없는 소나기가 퍼부을 때, 당황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세상일은 한치 앞도 알 수 없기에, 하루는 좀 더 신중히 준비되어져야 한다.
‘오후 한 때 소나기’로 당신이 놓치는 소중한 무언가가 생기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