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자형 인재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통섭형 인재라고도 부르는 이 커리어 유형은 초반에는 얇고 넓게 경험과 지식을 쌓다가 어느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들어 마치 T자형처럼 커리어를 쌓는 것을 뜻하는데, 재이는 연애에 있어 자신이 마치 본의 아니게 연애 커리어?를 이렇게 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일이 멀다 하며 짧게 짧게 연애했던 20대 초반을 거쳐 B에게 정착했던 20대 후반이었다.
단언컨대 '백남(男) 이불여일남(男)', 백 명이 넘는 이성을 만나본 희대의 카사노바보다 장기적으로 한 이성과 오래 교제한 사람이 연애를 더 잘 알 것이라고 재이는 생각한다. 3년을 만났던 B 와의 연애는 참 다사다난했고, 사랑 뒤에는 미움이 붙어있다는 애증이란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그것은 짧게 많은 사람과 연애했던 것보다 사랑과 연애와 상대방에 대해 훨씬 깊은 감정이었다.
연애가 길어진 결혼 적령기의 남녀들의 자연스러운 다음 코스는 두 사람의 미래를 함께 그려보고 논하는 것이다. B는 종종 자신이 얼마의 재산을 모아놓았고 우리가 결혼하면 집이 어디가 될지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실 거라며(그는 막내아들이었지만 결혼 후 혼자 계실 어머니를 걱정을 많이 했다) 그녀에게 미래를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B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혼 얘기를 꺼내면 왠지 모르게 위축되며 소극적으로 변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는 기분이 상하곤 했는데, 그녀도 그런 그의 기대에 부응해서 함께 그 미래를 그려보고자 했으나 왠지 쉽지가 않았다. 뭐가 내키지 않는 건지 그녀도 잘 알 수가 없어서 B가 그런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냥 웃으며 우린 아직 젊으니 급할 게 없지 않냐며 워워~ 그를 다독거리는 그녀였는데, 그는 급기야는 어머니가 싸주셨다며 그녀의 자취방에 반찬을 가져다 놓고, 그의 어머니가 결혼하면 그에게 주려고 했다는 아껴놓았다던 새 식기를 그녀의 자취방 이사 기념 선물로 가져오기도 했다. 마치 '네가 준비가 안되었다면 내가 준비가 될 수 있도록 해주지'라는 포스로 그는 슬슬 그녀의 영역에 본인의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게 좋으면서 싫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게 그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 적극적으로 그녀와의 미래를 주장하는 행동?이라는 것은 좋았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마음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고 일방통행으로 쭉쭉 밀고 들어오는 그를 향해 '아니야, 아직, 나는 준비가 아직 안되었어' 라며 기다려 달라는 그녀의 마음의 소리가 계속 들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재이는 차마 그가 상처 받을까 봐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말하고 나면 그들의 연애가 끝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졸지에 B의 어머니 반찬까지 받게 된 그녀는 뭔가 큰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음속에선 '좋아하는데 뭐가 문제야. 그가 이렇게 원하는데 그냥 결혼을 하지 뭘 그렇게 망설여?'라는 소리와 '아냐.. 결혼은 완전 딴 얘기잖아. 내가 정말 이 사람과 남은 인생을 함께 할 만큼 자신이 있나? 누군가 운명의 종소리를 뎅뎅뎅 울리듯, 당신은 이 사람과 결혼할 운명이었어!라고 알려주면 좋겠다'라는 망설임이 함께 아우성을 치며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친구들의 의견도 분분했는데, 소위 그의 조건과 스펙을 보고 '결혼하면 누구나 맘고생을 하기 마련인데 울어도 벤츠 뒷자리에서 울지 시장바구니 들고 울지는 본인이 결정하는 거다'라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만하면 허우대 멀쩡하고 성격 좋겠다 그렇게 널 좋아해 주겠다 대체 어디가 문제냐'라며 그녀에게 네가 눈이 너무 높아 문제야라고 충고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왜 결혼이란 건 이렇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인생의 다음 단계처럼 다가오고, 안 하면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을까? 연애의 다음 단계는 무조건 결혼인가? 여기서 재이가 B와 결혼을 안 하고 연애만 하자고 하면 그녀가 이상한 사람 되는 건가? 그녀는 왜 B와의 결혼을 망설일까, 남들 말마따나 그의 경제적 조건이 눈에 안차서? 그렇게 따지면 재이는? 그녀라고 뭐 취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제 겨우 자취방 보증금을 마련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