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이는 이제 더 이상 연애를 쉽게 시작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좋아해 준다 해서 시작한 쉬운 연애들이 어떻게 끝나는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B와의 이별은 그녀에게 연애가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도 알게 했다.
연인은 사랑과 시간이 곱해진 관계라는 점에서는우정을 나눈 친구나 피를 나눈 가족과 비슷한 것 같지만 그 감정의 밀도가 기간에 비해 매우 높은 반면 점하나를 찍으면 '님'이 '남'이 되는 '이별'이란 리스크를 항상 그림자처럼 지고 다니는 것이라는 걸 그녀는 이제 경험으로 배웠다. 마치 큰 투자엔 큰 리스크가 붙어 다니는 것처럼. 재이는 본인의 감정을 통 크게 걸었다가 탈탈 털려버린 빈털터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 도박? 에 본인을 더 이상 걸고 싶지 않았다.
그 시절 재이가 주변인들에게 습관처럼 하던 말이 있다.
"어떻게 얻은 황금 같은 주말에, 가족들과 맛있는 것 먹고 친구들하고 놀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 시간을 님이 될지 남이 될지 모르는 사람과 뭣하러 밀당을 하고 있어?"
연인에 비해 가족괴 친구는 헤어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생을 함께할 탄탄한 그녀의 재산이 아닌가. 관계라는 것도 감정의 투자와 저축이 필요한 것을. 장기 여행을 갔다 돌아온 내 집앞 시들시들한 정원에 재이는 다시 하루하루 물을 주고 가꾸는 느낌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 시절 재이에게 가장 힘든 건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해봐라. 거의 10년 가까이 남자 친구라는 존재를 옆에 항상 두던 그녀가 당시 가장 참기 힘든 금단증상이 뭐겠는지. 그것은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주특기였던 새로운 연애를 재빨리 시작하는 것. 그것을 그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연인 갈아타기'를 하지 않고 순순히 솔로의 길을 걸으면서 그녀는 본인의 끊임없었던 연애의 패턴 저 밑바닥에 깔린 감정의 근간이 본인의 '외로움'이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이는 본인의 외로움을 채울 대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냈고 그 대상에게 본인의 외로움을 채운 대가로 그녀를 기꺼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속박하게 했음을말이다. 그리고 이별이 가져다준 자유는 그녀에게 다시는 연애가 속박과 같은 의미가 되어선 안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의 조건 두 번째
당신의 반쪽을 바깥에서 찾지 말아라. 당신은 처음부터 반쪽이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 그 자체로 이미 온전하다. 외로움, 혹은 그 어떤 당신의 불완전함이 본인이 아닌 그 어떤 외부 대상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본인이 불완전함 자체로도 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순간 당신은 완전한 존재로서 타인을 그 존재 자체로 온전하게 사랑할 준비가 된다.
세상 다 살아낸 도인처럼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당시의 재이는 그렇게까지 본인의 마음을 정리해내진 못했었다.
다만 B와의 힘든 이별의 끝에서 지쳐버려 새로운 연애를 할 맘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외로움이 갑자기 없어지진 않았고 그녀는 그저 묵묵히 그 감정을 지켜보며 그 외로움을 일로, 친구로, 가족으로, 온갖 취미생활로 채워가며 그 시간을 버텨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1년 남짓했던 솔로의 기간은 그녀에게 '외로움' 이 그렇게까지 나쁘고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 혼자여도 완전할 수있다는 것, 그럭저럭 있는 그대로의 외로운 본인이라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오랜 기간? 솔로를 자처하며 버텨왔던 그녀에게 C가 생겼다. 아주 오랜만에 당시 남사친이었던 C를 만났던 날이었다. C도 왠일인지 매우 반가워하며 PC방에서 뛰쳐나와 그녀와 간만에 오래된 학창시절 추억 얘기들을 안주삼아 맥주를 한잔 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들은 그걸로도 모자라 2차로 근처 그들이 대학생시절 자주갔던 웨스턴식 조그만 바를 찾아가 한참을 웃고 떠들었는데 그의 유럽 여행 얘기가 재이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많은 과거를 공유하는 이와 함께하는 편안함에 그녀도 모르게 많이 취했던 그날 저녁, 그녀는 술기운에 취했는지, 그에게 취했는지, 연애 금단증상에 스트레스가 쌓였었는지? 그만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