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이만하면 복이잖아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희망을 품는다. 한 해의 마지막의 계절 12월에는 다음 해에 바라는 것들을 생각한다. 우리는 한해를 그렇게 마무리하며 자라왔고 그 모습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해의 끝을 마무리하며 좋은 기억이 클 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올해만큼만'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지 않은 기억이 클 땐 '좋은 일만 일어났으면'하는 바람이 크게 들 것이다. 우리는 어떤 과거를 경험했더라도, 그것을 추억으로 흘러 보내고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나는 87년생 토끼띠로, 올해가 블랙토끼의 해라고 하니 토끼라는 네이밍 때문에 괜한 내적친밀감을 느꼈다. 근거 없이 올해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으로 1월을 맞이했다. 시작은 늘 설렘을 껴안게 만든다. 나 역시 해가 바뀔 때 기분 좋은 기대감을 품는다. 그 시기에만 나눌 수 있는 남편과의 이러쿵저러쿵 설레발 넘치는 대화가 즐거웠다.
그런데 이게 웬걸. 생각지도 않게 갑상선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음,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리고 여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나는 보기와 달리 아주 건강한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했었고 잔병도 별로 없었다. 아파서 병원에 갔던 기억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암이라니. 물론 크기도 작고 초기라서 수술이 급한 경우는 아니다. 하지만 처음 겪는 암이라서 처음엔 많이 놀랐다. 진단받은 첫날에는 크게 당황한 마음에 눈물이 뚝뚝 뚝뚝. 허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아직 수술은 안 했지만 일상을 잘 보내고 있다. 갑상선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지낸다. 그러다 문득 주변 사람들이 근황을 묻는 말에 '아, 나 갑상선암이지.' 하고 상기하는 듯하다.
갑상선암을 진단받아서 겪는 특별한 일은 없다. 그 일이 꼭 아니었더라도 달라는 점은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전과 다른 점을 말하자면, 운동을 꾸준히 하고 전보다는 건강한 음식을 먹으려고 하고 있다. 운동은 하면 좋은 거지만 안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오전 루틴 중에 꼭 놓으려고 하고 시간을 내서라도 하는 듯하고 아직까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다. 방심하면 쭉 안 가게 되는 걸 아는지라 항상 경계 중이다.
음식은, 배민을 덜 시키고 집밥 할 때 간을 조금 더 심심하게 하고 야식은 잘 안 먹는다. 고기를 좋아하는데 조금 줄였더니 몰랐던 식품군의 종류들을 알게 되는 새로움도 생겼다. 항상 먹던 알고 있는 아주 맛있는 맛이라서, 그것 위주로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 온라인 장보기를 할 때도 처음 주문하는 것들이 꽤 많이 생겨서 '이 세상엔 맛있는 게 참 많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게 야식만 안 먹었는데 두 달 사이에 5킬로가 빠졌다. 기존 몸무게로 돌아오니 기분상 가벼워진 것 같고, 원래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나한테 맞는 몸무게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바뀐 점은 사실상 모두 좋은 변화들이다. 어차피 이대로 건강을 신경 쓰지 않았다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3년 뒤, 5년 뒤에 건강에 이상 증세를 겪었을 것이다. 똑같이 살았을 테니까. 운이 좋아 나는 피해 갈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과는 멀어지기로 했다. 나는 건강을 신경 쓰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건강에 관심이 있어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니 건강을 챙기는 사람의 이미지로 굳혀진 듯하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른 카테고리다. 이제 나는 관심 영역에서 행동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금에서야 내 몸을 위한 것들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다행이단 생각이 든다. 아마 이런 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쉽게 바뀔 리 없었을 것이고 몸과 마음이 편한 대로 지냈을 터이다. 동기부여가 되었던 게 사실이고, 큰 병이 아닌 것에 감사할 뿐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에 식단 관리와 운동 루틴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쌓아가야 하는 좋은 습관임에 틀림없다. 언젠가는 꼭 해야 하는 습관들을 5년 먼저 한다고 해서 억울할 일이 아니다. 적당한 긴장감을 있을 때 좋은 습관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있다. 할 수 있지? ㅎ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지만 대학병원에서 명의에게 수술을 받고 치료할 수 있다. 수술대에 오르는 하루는 크게 아프겠지만 며칠이면 금방 회복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을 갖고 있다. 아프지만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 아닌가. '맞아, 이만하면 다행이잖아.'라고 속으로 말한다. '맞아, 이만하면 복이잖아.'라고 생각한다.
크게 두 가지의 마음이 있다. 첫 번째는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괜찮은 것 같은데, 왠지 잘못된 길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다. 두 번째는 주어진 자리가 뭔가 불편한데, 왠지 맞는 길로 들어 선 기분이 들 때이다. 이것의 차이점은 방향성이다. 방향성의 차이로 내 마음의 평온함이 달라진다. 나는 지금 후자의 방향성에 들어섰다.
뜻밖의 사고를 만났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더 나은 곳으로 가는 길은 '생각'이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건강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문장들을 꾸준히 만나고 싶다.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쌓아온 좋은 문장들이 그새 마인드에 셋팅되는 효과를 누리고 있는 듯하다. 당장 써먹을 곳 없이 쓸데없이 읽는 것 같아도 이런 상황에서 절로 도움이 되니 또 읽고 쓸 수밖에 없구려. 중독이다, 중독.
올초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못하니까 괜히 더 생각나는 법.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나서는 올해 남은 기간 동안은 건강에만 신경 써야 하나 싶어 싱숭생숭했다. 그것도 잠시, 다르게 생각해 보니 건강에만 신경 쓸 수 있는 환경에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 아닌가 싶다. 남편 덕분에 누리는 여유로운 사치다. 그것을 인지하고 나의 변화된 일상에 풍성함을 느낀다. '짜증을 내서 무엇하리,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는 일에 더 관심을 갖고 말지.' 이렇게 내가 갖고 있는 행복을 생각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크 ~
우리는 살아가며 서로 다른 것을 경험한다. 다른 경험으로 깨닫는 것들 역시 달라진다. 나는 이 경험으로 어떤 깨달음을 얻을까. 과거에는 쓰지 않던 생각과 감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상을 살아가라는 그린라이트다. 기존에 서 있는 지점에서 방향을 틀기란 어려운 일인데, 약간의 명분이 되어준다고도 해야 할까. 어쩐지 해방감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키를 돌린 방향성이 긍정적인 것들이라 되려 고맙다는 생각도 든다.
담담하게 지금처럼 잘 보내고 싶다. 그러다 또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나면, 그땐 감정을 속이지 않은 하루를 보내다가도, 또 다음 날부터는 일상을 보내겠지. 용기가 필요한 일엔 몇 번 놀랄 수는 있어도, 결국 내가 가야 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갑상선암은 어쩔 수 없는 사고다. 그것은 나에게 전부가 아니다. 단지 일어난 일의 한 부분일 뿐이다. 갑상선 하나를 내주고도 곧 괜찮을 거란 예감이 든다. 연말이 오고 해가 바뀔 쯤에는 늘 갖았던 감정대로 좋은 생각을 하며 다음 해를 맞이할 것이다. 어디 보자, 이런 내 마음가짐 아주 좋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