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힘든 날에도 기쁜 날에도 보통날에도 어디론가 툭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 설렘이 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있다. 새로운 곳에 가면 내 안의 있는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익숙한 곳과는 다른 풍경과 공기를 느끼며 내가 있던 세상과는 다른 세계를 감탄하며 해방감을 느낀다. 나도 새로워진 기분이 든다. 도착해서 얼마쯤은 새로운 것에 취해있다. 그 즐거움이 커서 새로운 세계에 동화되어 있을 때는 나는 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나로서 생각하는 시간을 마주한다. 낯선 세상의 배경들의 조금씩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때 익숙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곳에 도착해서 잠깐은 화려한 무언가에 시선이 쏠리겠지만 곧 내가 하던 생각으로 돌아온다. 새로운 생각들이 가라앉고 친근한 생각들이 올라온다. 평소 자주 하는 쓸데없는 생각, 어떤 불안, 어제 했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새롭다기보다는 내 마음속에 두었던 것들이 반영되어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내가 가진 틀 안에서 더해진 생각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선명해진 내 모습을 확인받는 느낌이다. 단절감이 느껴질 때도 확연히 나와 다른 무언가를 느꼈을 때도 그랬다.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 경계선이 뚜렷해지면서 고유한 나의 존재가 더 가까이 느껴진다. 그 느낌이 지속될 때 나는 더 선명해졌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뜻밖의 시간, 우연히 일어난 사건, 낯선 향기, 새로운 장소, 처음 보는 풍경, 익숙하지 않은 공기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처음에는 새로움에 동화된 듯하다가 어느쯤에는 무언가에 대한 간극을 확인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어느 곳에 가도 나로서 선명해지는 순간을 경험하면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여행은 그래도 된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그 일을 알아차리는 게 여행일까. 여행을 통해 나의 고유함은 빛을 잃지도 퇴색되지도 않을 만큼 어디서든 나로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나로서 행복해지면 된다. 그뿐이다. 떠나는 모든 여정들은 기꺼이 내가 되는 시간들을 만들어준다. 겨우 내가 되려고 그런 게 아니라 기꺼이 내가 되고 싶게끔.
낯선 곳은 이방인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항상 있던 자리에만 있을 때만 몰랐던 나의 작고 얕은 세계를 조금씩 늘려주기도 했지만, 늘 나로서 선명해지는 느낌을 갖게 했다. 내가 나로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느끼게 했다. 떠나갔던, 떠나왔던 모든 순간들은 기꺼이 내가 되려고 했던 시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어떤 곳에 있더라도 나로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누군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를 정의할 수 있는 힘은 내 안에 있다. 즉 어떤 곳에 있어도 내 안의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늘 내 안에 있다. 나는 나를 이탈할 수 없다.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word would smell as sweet.
이름이 무슨 의미죠?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그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향기엔 변함이 없을 것을.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