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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pr 07. 2023

산문적인 인간을 위한 변명(2)

시인의 삶을 동경하는 아침


바람에 일던 먼지가 차분히 가라앉았다는 말로 시간이 지나 화가 풀렸다는 말을 대신하는 시인의 삶은 어떤 삶일까? 그의 시선은 과연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했길래 길가에 핀 작은 잎새를 쳐다보느라 가던 길도 잊어버리고 마는가?



도초(道草), 일본인들은 한눈팔기라는 말을 길가에 홀로 피어 있는 풀 한 포기로 그려냈다. 길을 걷다 초록빛 풀에 시선을 뺏긴 나머지 그대로 멈춰 서서 멀그머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 한눈팔기를 훔쳐올 정도라니 그들의 시적 감수성에 놀라고 만다.



문향(聞香), 옛 선비들은 향기를 맡을 때 들을 문 자를 썼다. 물리적인 실체 중 가장 비현실적인 존재를 기리기 위한 훌륭한 선택이지 않은가.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는 강가에서 부끄럽다는 듯이 홀연히 밤공기 속으로 슬쩍 자신을 흘려보내던 얼굴 없는 라일락의 목소리를 가만히 서서 듣고 있던 그날 밤이 하염없이 그리워졌다.



나쓰메 소세키는 줄곧 시인과 철학자를 대비시키곤 했다. 아마도 철학적 명료성을 추구하는 사명을 시인의 감수성에 투영시켜 작품활동을 해왔던 사람인만큼 그러한 고뇌를 작품 속에 이입시키는 것이야말로 그로서는 밥을 먹고 책을 읽는 일처럼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세키의 정신을 이어받아 나도 한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인과 철학자는 어떤 사람인 것 같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우리 둘은 그에 관한 대화로 물든 시간 동안 치앙마이의 한적한 도로를 달리기도 했고, 제주의 바다에 사무치기도 했었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은 철학자를 꿈꾸던 사람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해를 사랑의 절정까진 아니더라도 사랑의 강력한 징후로 여겼던 내게 이해에 관해 반문하던 시인의 외마디 외침은 침몰하던 난파선을 마지막으로 덮친 파도와 같았다.



통속적인 시름이 바람처럼 불어와 공중으로 일던 먼지가 가라앉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드는 생각이지만, 시인의 눈을 통해 살아가는 삶,



시인의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


정작 스스로 삶을 해명하지 못한 채 왜 우리는 다 함께 시인의 눈으로 삶을 동경하지 못하는 걸까?


릴케의 시가 그립다.

시인 소세키가 사무쳤다.

책장에서 다시 그들을 꺼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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