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타인을 이해하려고 할까요? 예를 들어서 요새 유행하는 시류에 따른다면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왜 MBTI를 물어볼까요?
그저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 또는 관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목적을 조금 들여다보면 다른 이유가 보입니다. 어쩌면 이건 우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홀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은 세계를 해석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누구는 타고난 친화력으로 외부 세계를 내면화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다른 모습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둘의 근원은 동일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정말 모릅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옳았다면 기억의 각성을 통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떠올릴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보아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3 수험생이 아무리 풀어보려고 노력해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 앞에서 절감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잠깐 생각을 멈추고 우리의 삶을 반추해 봅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타인을 포함한 사물의 세계를 해석하고자 합니까? 반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해석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습니까?
이질감이 있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해석하기 위해선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해가 없다면 해석이고 분석이고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말버릇처럼 하는 말 중에 "난 널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합니다.
즉 이해는 대개 이해할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은 자신과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해석을 위한 선행조건인 이해는 결국 동질감의 확인이자 회복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 보면 자신과 다른 것을 이해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것은 이해가 아니라 수용과 포용의 대상일 것입니다. 단 우리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렇습니다.
이질적인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동질성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해였습니다. 굉장히 모순적입니다만 따지고 보면 그랬습니다.
결국 우리는 타인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이해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