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절대성은 언제 드러나는가?
절대적 고독에 관하여
아래에 이어지는 글은 7월 말일에 메모장에 끄적였던 것이다. 당시에 나는 고립된 섬에 홀로 유배된 사람 같은 심정이었는데 이는 자발적인 것으로 혼자서 세상의 무게를 감내하고자 했던 순수한 의지의 발현에 의한 것이었다.
비록 그 내용이 유약한 한 인간의 나약함을 읊조리는 것일지라도 그러했었다.
제주에 사는 여동생 내외가 부모님을 뵙기 위해 상경하였었다. 하지만 매제는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하는 이유로 먼저 발걸음을 다시 제주로 돌려야만 했다.
매제가 제주에 잘 도착했다며 가족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기자 아버지께서는 가족과 재회하기 전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잘 즐기라며 그게 바로 인생이 아니겠냐며 덕담을 남기셨는데 그때 별안간 어떤 그림자가 나를 엄습해 왔다.
어둠 속에서 검은 이빨을 내밀며 등 뒤를 덮친 절대적 고독. 이러한 절대적 고독은 말로만 듣던 것이었지만 인생의 종착역인 죽음에 이르는 순간은 곁에 누가 있든지 죽음을 맞이하는 주체는 오로지 나 한 사람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마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심연 속에 존재하는 절대적 고독을 마주친 순간 숙연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차분했다. 이제까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던 외로움 앞에서 술렁이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는 오로지 혼자 겪어야만 하는 마지막 관문이라는 사실 앞에서 갑자기 나 자신이 작아졌다.
예수님이든, 위대한 대통령이든, 길가에 떨어진 모이를 쪼아 먹는 작은 참새든 그 관문은 올곧이 혼자 통과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절대적이었고 굉장히 차가웠다.
누가 옆에 있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임종을 바라보고 있든지 간에 눈을 감고 마지막 숨을 내뱉고 심장 박동의 마지막 고동을 느끼는 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몫이다. 이게 바로 절대적 고독이다.
냉소를 머금고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노려보는 맹수와 같았다. 임종을 맞이할 때 눈을 감는 순간 아마도 끝없는 어둠이 나를 덮쳐오겠지. 심연의 어두움을 마주 보면서 내 주위에 있던 모든 인간들이 가진 지휘의 고저 여부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막대한 적막과도 같은 절대적 고독이 내 머리 위로 덮쳐오는 그 순간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독교의 교리가 진리라면, 당신이 그토록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그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당신은 어둠 속 어딘가에서 우리를 끌어안아 주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외치고 싶었다.
마지막 순간에 반드시 당신이 마중을 나와야 한다고, 그래야만 이토록 공허하고 허망한 삶이라는 시간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투쟁하며 살아가야만 했던 불쌍한 인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신성일 것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전쟁터에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시커먼 운명을 거쳤던 사람일지라도, 이 세상에서 참된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했던 사람일지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반드시 그 끝에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계셔야 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많은 인파로 붐볐던 텅 빈 광장에서 절대적 고독에 무릎 꿇은 나는 여전히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마치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비련의 인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