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지고, 달빛이 흐릿하게 언덕을 비추고 있었다.
잿빛 날개의 천사는 언덕 꼭대기에서 고독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날개는 천천히 흔들리며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는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천사는 몸을 돌려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악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악마의 날개는 더 이상 검지 않았다.
회색빛이 깃들어 있었고, 그의 뿔은 사라져 있었다.
옷자락에는 천사와도 악마와도 닮지 않은, 묘한 균형의 색채가 스며 있었다.
천사는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는... 왜 이런 모습이 된 거지? 너도 변화한 건가?”
악마는 천사의 경계 어린 눈빛을 가볍게 무시하며 웃음을 지었다.
“변화했다고 내 본성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나는 여전히 악마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너의 길을 보는 것이 흥미로울 뿐이다.”
천사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악마는 감정에 휘둘리고 욕망만을 따르는 존재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나를 지켜보는가?”
악마는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천사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 또한 내 감정이고 욕망이다. 너를 따라 다닌 다기 보다는, 네가 가는 길을 보고 싶을 뿐이다.
너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고, 그 길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네가 틀렸는지, 아니면 내가 틀렸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천사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악마의 태도는 변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네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네 날개가 회색으로 물들고, 네 뿔이 사라진 것이 단지 우연은 아닐 텐데.”
악마는 잠시 자신의 날개를 살펴보았다.
“내 모습이 변했다고 해서, 내가 너와 같아졌다고 착각하지마라.
나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다.
하지만 너를 보며, 내가 가던 길이 모든 답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변화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천사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내 곁에 있는 이유는 단순히 나를 비웃고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뜻인가?”
악마는 천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답했다.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네가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가능성... 그게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천사는 그의 솔직한 대답에 잠시 미소를 지었다.
“너의 말 대로라면, 나도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 실패 속에서도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거다.
너 역시 그 변화를 선택했다면, 이미 네 안에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겠지.”
악마는 천사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나를 그렇게 평가하다니, 정말 재밌군. 하지만 그래, 네가 말한 대로일지도 모르겠다.”
밤은 더 깊어지고, 언덕 위 공기는 묘하게 갈라져 있었다.
위쪽에서는 달빛이 희미하게 퍼지고 있었고, 아래쪽에서는 어둠이 밀려 올라와 두 존재를 감싸고 있었다.
천사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악마의 이마 위, 뿔이 사라진 자리에 미약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것은 불길이 아니라 오래 식은 쇳덩이가 남긴 잔열처럼 아릿하게 번졌다.
반대로 천사의 날개 끝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잿빛 깃털은 흔들릴 때마다 미세한 서리를 흩뿌리듯, 공기를 식히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 공기가 갈라졌다.
한쪽은 뜨겁고, 한쪽은 차가웠으나 그 경계가 마주하는 순간, 열기와 서늘함은 서로를 소멸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달빛이 그 경계를 따라 번져나가며 은빛 띠처럼 둘을 감쌌다.
천사는 그 빛의 흔들림을 느끼며 낮게 중얼거렸다.
“너의 흔적은 여전히 불길이군.”
악마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너는 아직 서리를 품고 있지.”
말이 끊긴 순간, 바람이 불었다.
뜨겁던 열기와 차갑던 기운이 동시에 뒤흔들리며, 두 존재의 그림자를 언덕 아래로 길게 하나로 이어놓았다.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의 눈 속에 비친 잔열과 서리는, 더 이상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을 증명하는 표식이자, 동시에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최초의 증거였다.
그들은 언덕 위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한 존재는 하늘을 향해, 다른 존재는 아직도 어둠을 등에 지고 있었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