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도 검붉은 지옥의 심장, 그곳에서 모든 악마를 통솔하는 왕이 자신의 거대한 왕좌에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순간, 한 악마의 고민과 혼란스러운 독백이 그의 내면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치 불길의 균열 사이로 새어나오는 바람처럼 미세했지만, 그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흥미롭군. 악마라는 놈이 인간의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스스로를 관조하고 있다니."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그 미소는 섬뜩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왕의 눈이 열리자, 그 주위의 어둠이 진동하며 번개처럼 튀었다.
왕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명령하지 않았지만, 이미 수많은 악마들이 그의 의중을 눈치채고 왕좌 앞으로 몰려들었다.
"왕이시여!"
한 악마가 고개를 들며 외쳤다.
"저것은 더 이상 악마가 아닙니다. 저놈은 우리처럼 순수한 욕망도, 타락한 자의 본능도 없습니다.
잿빛 천사를 만난 뒤로 혼란에 빠져 무슨 천사 흉내라도 내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악마도 뒤이어 동조했다.
"맞습니다! 저놈은 악마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악마도, 천사도 아닙니다. 저건 이제 불완전한 존재일 뿐입니다!"
지옥은 한순간 소란으로 가득 찼다. 수많은 악마들이 왕의 결정을 요구하며 울부짖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경멸,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저런 혼란스러운 존재가 자신들의 세계를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마의 왕은 조용히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소란을 멈추었다. 그 순간, 지옥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그의 목소리는 깊고 장황하여, 공간을 가로질러 모든 악마들의 귀에 명확히 들렸다.
"저 놈이 진정 악마가 아니라고? 그것도 욕망의 한 형태가 아니겠느냐?
인간의 불안정한 감정에 탐닉하며 그들의 공포와 갈망을 즐기는 너희들과,
자신 내부의 불안정한 감정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새로운 불꽃을 찾는 저 놈...
무엇이 크게 다르단 말이냐?
너희는 타인의 혼란을 뜯어먹고, 그 놈은 자신의 혼란을 삼키며 변화를 좇는다.
대상이 다를 뿐, 둘 다 욕망의 추구다.
그 방식이 낯설다고 해서, 어찌 악마의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악마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했다. 왕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유와 욕망은 악마의 본질이다. 우리는 인간처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천사처럼 이성에 짓눌리지도 않는다.
그의 혼란과 고민도 그 자신의 욕망의 일부다.
그것은 그의 자유이자 존재의 방식이다.
그가 어떤 결론에 이르든, 그것은 그의 몫이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러나..."
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왕좌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가 우리와 다르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본질까지 부정하지는 않겠다.
욕망을 좇는 한, 그는 여전히 악마다.
다만 그 욕망의 방식은 우리와는 다르다.
그러니 본질은 인정하되, 그 다름을 표식으로 남기겠다.
그래야 지옥의 질서 속에서 모두가 납득할 것이다."
왕은 그렇게 말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그 순간, 그의 웃음 속에서 피 냄새와 불길의 뜨거운 쇳내가 뒤섞여 흘러나오는 듯했다.
악마들은 술렁거렸지만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왕의 결정은 절대적이었다.
왕의 손짓 하나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잿빛 날개의 천사를 만났던 악마가 강렬한 힘에 의해 왕좌 앞으로 소환되었다.
그 순간 지옥의 대전은 숨죽인 정적에 잠겼다.
수많은 악마들의 눈빛은 매서웠고, 공기는 불길에 그을린 쇳내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곳에서 왕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이 곧 축복이 아님을 그는 직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주변의 야유와 날카로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꺾이지 않은 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는 왜 불려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지옥의 대전은 스스로를 변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왕의 판결이 내려지는 자리였다.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그 길에서 움튼 낯선 욕망이 지금 이 순간 단죄의 불길 위에 올려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선택을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왕은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너의 혼란도, 너의 자유이자 욕망이다.
그 욕망이 존재하는 한, 넌 여전히 악마다.
그러나 그 욕망의 길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타인의 혼란을 먹고 힘을 얻지만, 너는 스스로의 혼란을 삼키며 변화를 좇는다.
그 차이는 작지 않다. 지옥의 질서는 혼돈을 공유하되, 불꽃의 결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니 너의 본질은 인정하되, 그 다름은 분명히 새겨야 한다.
이것이 너의 표식이 될 것이다."
왕의 손짓이 떨어지자, 지옥의 불길이 일렁이며 그의 뿔을 감쌌다.
뜨겁고도 강렬한 불꽃이 그의 뿔을 태워버리며 사라지게 했다.
고통이 그의 얼굴을 스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며 소리 내지 않았다.
그의 검은 날개가 회색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박쥐같은 그의 검은 날개가 잿빛으로 물들어, 마치 그가 악마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듯했다.
악마들의 왕은 그의 앞에서 말했다.
"너는 이제 악마이자 악마가 아니다. 단지 새롭게 인정받은 존재다.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선택은 네 자신과 함께할 것이다.
잿빛 날개의 천사처럼, 너의 길을 걸어라.
이 표식은 너를 우리와 다르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네 본질은 여전히 악마다.
욕망과 자유를 좇는 그 불꽃은 태초부터 우리 모두를 묶어온 근원이며,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부를 바꾸지는 않는다.
너의 뿔은 꺾였고 날개는 잿빛으로 물들었지만, 그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넌 끝내 악마의 일부일 것이다.
지옥의 질서는 다름을 새기되, 본질은 지우지 않는다."
주변 악마들은 여전히 그를 조롱했지만, 왕의 결정 앞에서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지옥에서도, 천국에서도 속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새로운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모두 받아들이며, 다시 한번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떨어진 뿔과 회색으로 변한 날개는 그에게 고통과 동시에 새로운 빛을 비춰주고 있었다.
"나 또한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그렇다고 잿빛 날개의 천사와 같은 존재도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일 뿐이다."
악마는 사라진 뿔이 있던 자리를 어루만지며 어둠 뒤의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