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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천사(9화) - 동행(1/2)

by 장발그놈

천사가 물었다.

“그럼, 네가 내 길을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악마는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의 발길이 머무는 곳을 따라갈 것이다.

네가 인간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도 내 선택을 할 것이다.

내가 너와 같은 길을 가게 될 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어둠 속으로 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선택은 너의 몫이다.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나와 함께 걸으려 한다면, 네가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함께 언덕을 내려와 인간 세계로 향했다. 한쪽에는 잿빛 날개의 천사가, 다른 쪽에는 변화를 받아들이고자 한 악마가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천상이나 지옥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걷는 길은 인간 세계에 새로운 균형과 깨달음을 가져올 첫 걸음이었다.


깊은 밤, 황량한 언덕 위에 잿빛 날개의 천사와 악마가 함께 서 있었다. 인간들의 도시가 멀리 보이는 곳, 희미한 등불과 바람 소리만이 두 존재를 둘러싼 고요를 깨트렸다.

천사는 침묵 속에서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악마는 그의 옆에서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도시에서 너의 해답을 보여줄 것인가? 지금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고 있는가?그냥 이렇게 멍하니 서 있는 것도 너답긴 하군.”


천사는 악마의 말을 무시한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잿빛 날개는 달빛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 또한 답을 찾기 위해 인간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희망을 찾는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지 직접 봐야 한다.”


악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흥미롭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상태로 그들에게 무슨 변화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네가 주는 도움은 또 다른 불균형을 만들지 않겠는가.”


천사는 잠시 악마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더 이상 주어진 역할을 따르지 않는다.

나의 행동은 그들이 선택하도록 도울 뿐,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천사처럼 그들의 운명을 강요하지 않고 악마처럼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저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의 선택을 도울 뿐이다.”


악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거 참 고상한 말이군.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들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다. 너 자신이 더 혼란스러워질지도 모르지.”


그렇게 그들은 인간들의 도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잿빛 날개의 천사와 악마가 도착한 곳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마을이었다. 마을의 중심은 불타고 있었고, 사람들은 서로를 적으로 몰아가며 증오에 가득 찬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천사는 어린아이가 칼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너는 무엇 때문에 이 칼을 들었느냐?”


아이는 그의 낯선 모습에 겁을 먹었지만, 이내 고개를 치켜들며 외쳤다.

“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다 죽였어요! 나도... 그렇게 안 하면 안 돼요! 안 되잖아요!”


천사는 아이의 눈 속에서 깊은 슬픔과 분노를 읽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복수가 너의 고통을 덜어줄 것 같으냐? 너의 선택은 너를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빠뜨릴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옆에서 악마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어이, 꼬마야. 그의 말은 믿지 마라. 받은 만큼 갚아야 하는 법 아니겠어? 바보같이 너만 그 고통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


천사가 악마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네가 하는 말은 더 큰 혼란을 불러올 뿐이다.”


악마는 태연히 대꾸했다.

“나 또한 강요하지 않아. 선택은 이 아이의 몫이지.”


천사는 다시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네가 고통을 넘어서길 바란다면, 복수 대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네가 가진 분노를 사람들을 지킬 힘으로 바꿔라.

사람들을 도우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라. 너의 복수는 내가 다 짊어지고 갈테니 말이다.”


아이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천사와 악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칼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이내 눈물을 흘리며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복수하지 않겠어요. 저 사람들처럼 되긴 싫어요. 하지만... 제 가족이 겪은 고통을 저들이 잊지 않게 만들고 싶어요.”


천사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며 미소 지었다.

악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천사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흥미롭군. 네 방식이 통할 때도 있네. 하지만 항상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그날 밤, 천사는 혼자 불타는 마을을 헤매었다.

불길 사이로 숨어 있던 자들이 있었다. 무기를 들고 사람들을 죽인 자들, 아이의 가족을 짓밟았던 자들.

그들의 손에는 여전히 피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눈빛엔 죄책감이라곤 없었다.


천사는 그들 앞에 섰다. 잿빛 날개는 어둠 속에서도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한 아이의 마음은 칼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아이의 상처는... 누군가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잿빛천사의 손끝에서 조용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칼보다 날카롭고, 불보다 차가웠다. 천사는 그들의 기억 속 깊숙이 지워지지 않는 '고통의 순간'을 각인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가 되살아나는 환영에 시달리며, 칼을 쥐던 손이 떨리고, 입에 담았던 욕설이 피처럼 씻기지 않는 속죄의 언어로 바뀌는 저주를 받았다.

“내가 너희에게 남긴 건 형벌이 아닌 기억이다. 너희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다만... 그것을 외면한다면, 이 고통은 영원히 너희를 따라다닐 것이다.”


빛이 사라진 뒤, 무기를 쥐었던 자들은 하나둘 땅에 주저앉았다.

손에 묻은 핏자국은 이미 씻겼을 터였지만, 그들의 눈은 보이지 않는 얼룩에 사로잡힌 듯 떨리고 있었다.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시선 속에는 자신이 베어 쓰러뜨린 얼굴들이 겹쳐 떠올랐다.

칼을 휘두르던 순간의 분노가 아니라, 죽어가던 자들의 마지막 눈빛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 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다른 이는 귀를 막고 울부짖었다.

그의 귓속에는 불길과 비명,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멈춰! 제발 멈춰!”


그는 절규했지만, 환영은 더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어떤 이는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며 흐느꼈다.

그가 짓밟았던 생명들의 체온이 손끝에서 되살아나듯, 흙 위로 흘러들어와 전해졌다.

차갑게 식어야 할 기억이 뜨겁게 살아나는 순간, 그는 자신이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죄의 무게를 느꼈다.


그들 모두는 무기를 버린 채, 각자의 그림자에 짓눌려 있었다. 후회는 그들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게 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행위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천사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통은 형벌이 아니다. 스스로를 직면할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 후회는 새로운 길의 시작이 될 것이다.”


악마는 그의 옆에서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들이 그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후회는 쉽지만, 변화는 고통스럽지.”


천사는 악마를 바라보며 답했다.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느냐가, 결국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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