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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천사(11화) -정점의 대화

by 장발그놈

깊고도 검붉은 지옥의 중심에서, 악마의 왕은 왕좌에 홀로 앉아 있었다. 다른 욕망을 지닌 악마에게 표식을 남긴 후에도 그의 마음은 어딘가 무거웠다.


천사도, 악마도 아닌 새로운 존재. 그것이 단순한 변덕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더 큰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인지, 그 변화가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공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옥의 뜨거운 열기가 갑자기 차가워졌고, 타오르는 불빛 대신 은은한 광채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왕은 즉시 왕좌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는 떨리는 목소리가 힘겹게 빠져나왔다.

"지고하신 분이시여, 어찌 이곳에 친히 강림하셨나이까?"


왕은 고개를 숙이며 그 빛을 결코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 빛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서늘했지만 포근했으며, 부드럽지만 세상을 울리는 힘을 담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라, 어둠의 왕이여. 내가 너와 친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


지옥의 왕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신의 모습은 숭고하고도 단순했다.

그의 빛은 주변의 모든 어둠을 잠식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지고하신 분이시여, 혹시 저의 선택 중에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

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은 잠시 왕을 응시하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한 악마에게 큰 변화를 부여했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냐, 아니면 그 안에 의미를 두고 있었느냐?"


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 우리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름이 단순한 결함이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곳에 온 이유다.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지 몰라도, 너 또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 변화를 지켜보려 한다."


왕은 신의 말을 곱씹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지고하신 분. 우리는 각각의 역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천사들은 질서를, 우리는 감정을. 그것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까?

변화를 선택하고 지켜보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입니까?"


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너희는 지금까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그러나 역할에 갇혀있다면, 그것이 곧 쇠퇴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내가 천사와 악마들 사이에서 자율성이라는 큰 선물을 내린 인간들은 종종 나의 뜻을 몰라도 진리를 찾아내려 하고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 '성자는 천지도야요. 성지자는 인지도야라(聖者天之道也, 聖之者人之道也)'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마치 인간들이 내가 내려주지 않은 뜻과 의지를 이어가고 있다는게 느껴진다.

그들은 스스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의 이치를 깨달아가고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진리다."


왕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지만 저희는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까?

천사도, 악마도. 우리에게 변화를 허락한다는 것은 혼란을 초래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고요히 답했다.

"완성된 존재라...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인간들을 관찰하고 배우려 하는가? 유한한 인간들은 불완전하기에 성장한다.

인간들은 작은 미물조차 교훈을 찾으려한다. 개미에게는 협력을, 강에게는 흐르는 법을 배운다. 우리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왕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 그의 뿔 아래로 땀이 흐르는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신의 말 속에 담긴 무거운 진실은 그에게서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어둠의 왕이여."

신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는 네가 변화를 준 악마를 통해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너는 그를 우리와 다른 존재로 규정했지만, 그것이 곧 우리의 본질이다.

우리 또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하찮아 보일지라도, 결국 더 큰 균형을 이루는 데 기여할 것이다."


왕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저희에게도 배움이 남아 있다는 말씀이군요."


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변화는 혼란을 동반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정체되지 않는 이유다.

잿빛 날개를 가진 천사와 악마 같은 존재들이 새로운 길을 열 것이다. 너는 그들을 방해하지 말고, 그저 그 길을 지켜보아라."


왕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의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지고하신 분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저 또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신은 왕을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기억하라. 인간들은 미물에게서조차 배우고, 불완전함 속에서 성장한다.

그들의 방식이 우리에게도 교훈을 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이야말로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이다."


빛이 사라지며 다시 지옥은 본래의 색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왕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은은한 광채가 남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만의 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과연,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인가."


지옥은 여전히 뜨겁고 불길에 뒤덮여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이미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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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