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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천사(10화) - 동행(2/2)

by 장발그놈

그들이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난민 캠프였다.

그 안은 혼란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도 한 남성이 음식을 훔친 소녀를 붙잡아 소리쳤다.

“이런 도둑년 때문에 우리가 굶는 거야! 당장 쫓아내야 해! 한두 번이 아니야! 도둑을 안 쫓아내면 우리 다 죽는다고!”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해요... 제 동생이 굶고 있어서 그랬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사가 나섰다.

“그녀를 용서하라. 그녀의 행동이 옳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동생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자 악마가 비웃으며 말했다.

“용서한다고? 그럼 다음엔 또 누가 훔칠지 모를 텐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야. 규칙을 세우고 강하게 통제해야지. 그게 모두에게 공평한 일이지.”


천사는 침착하게 맞받았다.

“강제적인 규칙은 또 다른 불신을 만든다. 대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천사와 악마의 의견은 캠프 안에서도 갈등을 불러왔다.

이성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분노에 휩쌓이려는 순간, 천사는 사람들 앞에 서서 말했다.

“선택은 너희의 몫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너희가 믿음 대신 불신을 선택한다면, 이 캠프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천사의 말이 끝나자, 캠프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곧 누군가가 입을 열었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아이가 훔친 건 맞아. 하지만 동생을 살리기 위한 거였잖아.”

“그걸 계속 용서하면, 다음엔 누가 또 그런 변명을 하지 않겠어?”


캠프 한가운데 모닥불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그들 사이에 조용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격한 말이 오가기도 했고, 한숨과 침묵이 교차했다.

천사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이내 돌아섰다. 악마도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언덕 너머로 사라질 무렵, 모닥불 위로 조용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누군가의 말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우리가 지금 뭘 선택하든, 나중엔... 부끄럽지 않아야 해.”


그 말에 악마가 고개를 돌려 천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항상 너처럼 옳은 말을 하는 건 피곤한 일이야.”


천사는 웃지 않았지만,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해야 하니까.”


두 존재는 다시 말없이 어둠 속을 걸어갔다. 바람이 스치고, 발밑의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오랜 침묵 끝에, 악마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애쓰는 거지? 인간들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싸우고 갈등할 뿐이야.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지지 않아.”


천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오히려 더 돕고 싶다.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변화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악마는 말없이 천사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실패하는 걸 보려 했는데... 네 방식이 조금은 통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겠어.”


천사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확신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너 역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길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악마는 아무 말 없이 잿빛 천사의 옆을 걸었다. 말없이 지나치는 침묵 속에서, 그의 발걸음은 처음보다 조금 느려졌지만, 덜 무거워져 있었다.




잿빛 날개의 천사와 변화한 악마는 더 이상 천상도, 지옥도 아닌, 인간의 세계를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처럼 절대적인 힘이나 명령에 의존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인간들 사이에서 말 없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날은 분노에 찬 군중 앞에서 칼을 내려놓은 소년의 손을 바라보았고, 또 어떤 날은 서로를 증오하던 이웃들이 고통 속에서 손을 마주 잡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두 존재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았고, 때로는 아주 작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인간 스스로의 선택을 유도했다.


천사는 여전히 고독했다. 그는 스스로의 과거를 잊지 않았다. 추락의 고통, 균형을 깨뜨렸던 후회의 기억은 아직도 날개 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고독마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연민이 아닌 책임에서 비롯된 고요한 감정이었다.


악마는 천사의 곁에서 조용히 그의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엔 조롱과 의심으로 시작된 동행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내면에는 알 수 없는 떨림이 자주 일어났다.

인간들의 복잡한 감정 속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분노, 슬픔, 희망, 그리고 용서... 그 모든 감정은 그가 지옥에서 단지 약점이라 여겼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임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이 여정이 끝나는 날이 올까?”

악마가 어느 날, 고요한 저녁 언덕 위에서 조용히 물었다.


“끝나지 않더라도 괜찮다.”

천사는 달빛에 물든 도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리가 걷는 길이 누군가에게 조용한 빛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들의 여정은 끝이 없는 길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에 남은 따뜻한 손길, 작지만 결연한 용기, 침묵 속에서 피어난 공감의 순간들은 결국 이 세계를 천천히 바꿔가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의 진영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성과 감정, 질서와 자유,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로서, 인간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둘의 여정이 아닌, 모든 존재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걸음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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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