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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천사(12화) - 천상의 정원에서

by 장발그놈

천상의 정원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수많은 빛줄기가 푸른 하늘을 가르고, 그 빛이 흘러내린 곳마다 은빛 연못이 맺혀 있었다.

그 연못의 수면 위에는 한 점의 먼지도, 한 줄기 바람도 없었다.


그 중심에는 거대한 원형의 회의장이 있었다.

하얀 대리석의 기둥들은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고, 기둥 사이사이에 모인 천사들은 마치 조각상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그들의 날개는 순백의 빛을 머금은 채 그들의 불안정한 마음을 나타내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많은 천사들이 모였지만, 그들의 눈빛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여 묵상했고,

누군가는 차가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더 이상 완전한 일체의 공간이 아니었다. 신의 뜻을 전하던 천상은 이제, ‘뜻을 해석하려는 존재들’로 나뉘고 있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리며 빛의 결들이 회의장의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 빛 속에서 한 천사가 앞으로 나섰다.

"다들 정숙하고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고위 천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회의장의 공기는 여전히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천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판단을 굳혀가고 있었다. 언제나 질서와 일체감을 자랑하던 천상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느 천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신의 은총을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분배하는 일을 맡은 경험 많은 천사였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감정을 분석의 대상으로만 다뤄왔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통계가 아니며, 희망은 확률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정을 외면한 채 이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공정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핑계일 뿐입니다.”


그의 말에 또 다른 천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반대 진영의 대표 격으로, 언제나 규율을 지켜온 지닌 전통주의자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감정이 이성을 이기게 놔두자는 말입니까?

우리는 천사입니다. 감정은 인간의 것이며, 우리는 신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감정은 그 뜻을 흐리게 하며 정해진 인과율을 어지럽힐 뿐이지요.”


일순간 회의장은 말다툼과 논쟁으로 가득 찼다. 천사들은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향한 날을 세운 말들이 오갔다. 전례 없는 혼란이 천사들 사이에 생겨났다.


“우리가 인간처럼 되길 윈합니까?”

“아니, 우리는 인간을 더 잘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성만으로는 그들을 이끌 수 없습니다.”

“감정은 우리에게 독일 뿐입니다.”


그때, 회의를 주관하던 천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날개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며 회의장의 공기를 잠재웠다. 그는 잠시 천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만하십시오.”


순간 회의장은 숨죽인 듯 고요해졌다.

빛줄기가 천정에서 반사되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는 그 빛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늘 우리는 서로의 뜻을 확인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분의 뜻은 한 줄기의 빛처럼 단순하지만, 그 빛이 닿는 자리에 따라 각기 다른 색으로 반사됩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공중의 빛을 가볍게 쓸었다. 그의 손끝에서 미세한 파동이 일며 회의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성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며, 감정은 이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논의는 결론이 아니라, 사유의 시작입니다.”


천사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각자의 신념을 지키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신념조차 잠시 멈춘 듯했다.

“각자 자신이 본 빛의 색을 마음속에 새기십시오. 그 색이 왜 다르게 비추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때 우리는 다시 하나의 뜻으로 모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 회의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천정의 빛들이 서서히 흩어졌고, 천사들의 날개가 천천히 접혔다.

회의는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파행으로 마무리되었다.

전당의 문이 닫히고, 천사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 각자의 영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분명했다. 이 갈등은 더 이상 단순한 의견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천상의 일각에선 숨죽인 회합이 열렸다.

감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천사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그들은 희미한 은빛 조각들이 떠다니는 공간에 모여 앉았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잿빛 날개의 천사는 규율을 어겼지만, 우리가 외면해온 진실을 일깨워주었다.”

“신께서도 감정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사랑과 연민, 신께서는 그것을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지고 있다.”


이들은 논의 끝에 결심했다. 천상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되, 인간 세계로 내려가 그들과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이성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직접 배우기로.

그들은 스스로를 ‘이해의 무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반면, 전통을 지키려는 천사들은 이 움직임을 경계하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정을 받아들이는 천사들이 다시금 잿빛 날개의 천사처럼 타락할 것이라 믿었다.


“우리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신의 뜻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그 뜻을 어기기 시작하면, 천상은 곧 타락할 것이다.”

“변화를 멈춰야 한다. 필요하다면 직접 나서야 한다.”


일부 천사들은 감정을 수용하려는 자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몰래 지상으로 향하는 천사들을 붙잡아 윗선에 보고했다. 갈등은 점점 더 조직적이고 구조화되기 시작했다.


수백 년간 천상의 질서를 지켜온 고위 천사는 이 모든 혼란을 지켜보며 혼자 묵상의 방에 머물렀다.

규칙은 곧 평화였고, 평화는 곧 신의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잿빛 날개의 천사가 남긴 기록을 조용히 읽고 있었다. 그 속에는 인간 소녀의 고통, 천사의 흔들림, 추락 후의 깨달음, 그리고 다시 인간을 돕고자 했던 갈망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이었을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천상의 균열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감정과 이성, 이해와 규칙, 변화와 전통. 모든 것이 충돌하고 있었다.


'이해의 무리'들은 곧 잿빛 날개의 천사를 직접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회의보다 경험을, 명령보다 이해를 선택하고자 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선 이 모든 움직임을 '천상의 반역, 규율을 어그러뜨리는 자들'이라 규정하며 강경한 대응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상은 지금, 처음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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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