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는 무겁고 뜨거웠다.
양쪽의 날개 끝에서는 검붉은 불꽃이 일렁였고, 서로를 향한 증오와 불신이 숨소리마저 날카롭게 만들었다.
전통을 고수하는 악마의 무리 중 한 명이 먼저 나섰다.
그의 눈은 짐승처럼 번들거렸고, 손끝에서는 거칠고 날 선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지옥의 본질을 훼손하는 자들에게 자비는 없다!”
그 말이 떨어지자, 그는 손을 휘둘러 붉은 불꽃의 칼날을 만들어냈다.
변화를 지지하는 악마 중 한 명이 황급히 자신의 날개를 펼쳐 피했지만, 불꽃의 칼날은 그 끝을 스치며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한쪽 날개가 찢겨 나갔다.
비명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멈춰라!”
누군가 외쳤으나, 이미 그들 사이의 균열은 멈출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지옥의 불꽃은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불길 속에서 그림자들이 격돌하며, 검은 연기와 핏빛 불똥이 천장으로 폭죽처럼 튀어 올랐다.
날개가 찢기고, 이빨이 부서졌으며, 타오르는 심연의 불이 그들의 살갗과 영혼을 함께 삼켰다.
자신의 옆에 있는 자를 방패 삼았고, 적의 심장을 쥔 채 웃음을 터뜨렸다.
고통과 분노, 쾌락과 공포가 한데 뒤엉켜 있었다.
피와 불의 냄새가 뒤섞여 숨조차 쉴 수 없는 혼돈의 공간, 발밑의 검은 대지가 끓어올랐고, 용암 같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악마들의 외침은 더 이상 언어가 아닌, 본능의 울부짖음이자 존재의 비명이었다.
“지옥의 본질을 훼손하는 자들을 태워라!”
“자유를 두려워하는 자들이여, 너희가 어찌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려 하는가!”
그들의 외침이 부딪힐 때마다 불길이 폭발했다.
불꽃은 마치 의지를 지닌 생명처럼 방향을 바꿔 서로를 향해 덮쳤고, 날개가 타들어가며 떨어질 때마다 검은 재와 피가 한데 섞여 붉은 비처럼 바닥으로 쏟아졌다.
더 이상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단순한 전투가 아닌, 그 근본에 대한 전쟁이었다.
‘악마로서의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찢어 삼키는, 그 어떤 전쟁보다도, 심지어 그들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천사들과의 전쟁보다도 더 원초적인 파멸이었다.
두 진영의 외침은 불꽃보다 더 치열하게 부딪혔다.
지옥 깊숙이, 왕의 전당이 다시 한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검붉은 기둥들은 요동쳤고, 왕좌에 앉은 악마의 왕은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왕의 눈은 닫혀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수많은 악마들의 분열된 외침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불꽃 같은 금빛 눈동자가 전당 전체를 물들였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지옥 전체에 울림이 퍼졌다.
“모두, 왕의 전당으로 모여라.”
그 명령은 물리적인 언어를 넘어선 절대적인 의지였다.
마치 의식 너머를 울리는 종소리처럼, 지옥의 모든 악마는 그 부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왕의 전당은 금세 수많은 악마들로 가득 찼다. 격렬한 싸움을 벌였던 자들도, 그 불길한 권위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왕은 위엄을 갖춘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는 스스로를 자유롭다 여겼겠지. 그러나 너희의 행동은 자유가 아니다. 그저 자유라고 생각했던 틀에 너희를 구겨넣었던 것이지. 그것의 결과가 지금의 공포이고, 파괴일 뿐이다.”
왕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나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를 갈기갈기 찢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어떠한 자유라도 행동에 있어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자유가 인간이 숨쉬는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으면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았을것이며 그러기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그는 두 손을 들어올리더니, 싸움에 참여한 양쪽 무리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마치 그들이 불꽃의 인형처럼 공중에서 떠올랐다. 왕은 그들 사이에 걸어 나와,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단호히 외쳤다.
“지옥은 욕망과 자유의 땅이다. 그러나 욕망은 파괴만을 뜻하지 않으며 자유는 질서안에 있어야 한다.
너희들이 그 안에서 욕망의 자유를 누릴 수는 있으나 지옥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는 자에게 자유는 없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싸움에 관여한 모든 악마들에게 불꽃의 낙인을 새겼다.
이 낙인은 그들이 파괴로서의 자유와 조화로서의 자유 사이에서 무엇을 따르려 하는지를 끝없이 묻게 할 영원한 질문이었다.
“너희는 이제 증명해라. 변화가 너희의 타락이었는지, 아니면 진화였는지.”
왕은 마지막으로 일갈했다.
“만약 또다시 무의미한 파괴로 지옥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다면, 그때는 너희의 날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지옥의 심연에 영원히 불타오르도록 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 왕의 주위로 거대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 불길은 함성처럼 울리며 전당의 천장을 뒤흔들었다.
악마들은 누구 하나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그 불길 속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신성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꼈다.
왕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악마들이 무릎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타오르는 분노, 후회, 혹은 아직 꺼지지 않은 욕망들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담담히 바라보다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망토 끝에서 불길이 흘러내렸고, 그 불길은 바닥을 따라 퍼지며 붉은 문양을 그려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전당의 기둥이 낮게 울렸다.
그 울림은 마치 지옥의 숨소리 같았다. 억눌려 있던 모든 욕망과 고통,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불안이 발자국 아래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왕은 마지막으로 전당을 돌아보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비친 지옥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깨어나고 있었다.
“지옥은 변화를 겪을 것이다.”
왕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파멸이든 진화이든, 그 끝은 스스로들 증명하겠지.”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문을 통과했다.
전당의 문이 천천히 닫히고, 지옥 전체가 숨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잠시 후, 바닥에 남아 있던 붉은 문양이 천천히 일렁이며 미약한 불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왕의 부재를 알리는 잔불이자, 지옥이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야 할 새로운 시작의 불씨였다.
왕의 개입 이후, 지옥은 일시적인 정적을 맞았다.
그러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변화를 수용하려는 악마들은 왕의 낙인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지옥 바깥의 인간 세계로 나아갈 채비를 했다.
스스로를 '선택의 악마들’이라 부르는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유혹자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한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자 했다.
반면, 고전적인 질서를 따르는 악마들은 여전히 불만을 품은 채, 그들을 경계했다.
왕의 명령에 따르긴 했지만, 언제든 그들의 본질을 왕에게 인정받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지옥은 마치 태풍이 지나간 후의 수면처럼 잠시 고요했지만, 그 밑바닥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