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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천사(15&16화)-균열의 그림자/회색의 언덕에서

by 장발그놈

(15화)균열의 그림자


하늘과 지옥이 동시에 잠잠해진 시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인간들은 폐허 위에 다시 집을 세우고 있었다.

잿빛의 하늘 아래에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무너진 성벽 틈으로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이해의 무리와 선택의 악마들은 사람들 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처럼 눈에 띄지 않았고,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다.

때로는 어린아이의 발자국 뒤에, 때로는 촛불 앞에서 기도하는 노인의 어깨 뒤에 머물렀다.


천사의 한 무리는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도시 곳곳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천사는 장례식장의 문 앞에 멈춰 섰다.


조용한 공간엔 검은 옷의 사람들과 희미한 향 냄새가 가득했다.

그는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는 이미 지나간 이별 앞에서 왜 이토록 시간을 쓰는가?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는데, 그 시간에 살아 있는 자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은가?


그는 잠시 회의감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때, 울던 이들이 서로의 손을 잡으며 눈물 사이로 미소를 짓는 광경을 보았다.

그 미소는 단순한 위로나 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 다시 삶을 잇는 힘이었다.


천사는 그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낯선 공명을 느꼈다.

슬픔이 단지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이성이 도달하지 못한 깊은 이해의 방식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빛이 꼭 하늘에서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것이구나...”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 빛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감성이 이성 위에 서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천사는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이해’가 태어나는 자리라는 것을.


악마들 역시 변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파괴를 즐기지 않았다. 오히려 욕망이 어떻게 사람을 살게 만드는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중 한 악마는 전쟁이 끝난 마을의 불타 무너진 집터, 식지 않은 잿더미 속에서 작은 아이가 남은 빵 한 조각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옆에는 굶주림에 쓰러진 노파가 있었다.


악마는 흥미로웠다.

“먹을 것이 하나뿐이라면, 인간은 자신을 먼저 살리지 않던가? 또한 저 노파는 남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아이의 손이 잠시 떨렸다. 아이는 잠시 빵을 입에 가져갔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노파의 입에 그 빵을 작게 뜯어 밀어 넣었다.


악마의 눈이 작게 떨렸다.

‘자신의 생에 대한 욕망을 버린 것인가?’


그는 혼란스러웠다.

노파가 숨을 돌리자, 아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희생의 미화가 아니었다.

그 속엔 생존의 결심과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악마는 마음 속에 열기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욕망은 언제나 파괴의 불길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열이기도 했다.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과 서로를 살리고자 하는 욕망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같이 살아남고자 하는 것도 또다른 욕망의 형태가 아닌가...”


그 말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 속에서 욕망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처음으로 보았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욕망이 누군가의 체온 속에서 부드럽게 식어가며, 파괴가 아닌 생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악마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욕망은 타락의 시작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이어가기 위한 증명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불길 속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욕망이 인간을 무조건 타락시키는건 아니다.

욕망 또한 그들이 서로를 잇기 위해 사용하는 또 하나의 불빛일 뿐이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빛도, 어둠도 아니고, 오직 잿빛의 하늘만이 고요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보았다.

인간의 불완전함 속에, 자신들의 본질이 비춰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천상과 지옥 양쪽 모두에게 불편한 신호였다.


하늘에서는 이미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해의 무리들이 인간의 감정에 물들고 있다.”


그 말은 곧 '빛의 질서가 흐려지고 있다'로 번역되었다.


지옥에서도 비슷한 소식이 올라왔다.

"선택의 악마들이 불길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


그 말은 '욕망의 본질이 오염되고 있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이해의 무리와 선택의 악마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작은 변화가, 이미 하늘과 지옥의 모든것을 흔들고 있음을...


잿빛 옷을 입은 한 천사가 폐허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잿빛의 하늘 속에 작은 균열 같은 금빛 선이 스치듯 번쩍였다.

그 빛은 마치 무언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빛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이건 시작이겠지.”


멀리, 폐허의 반대편에서 한 악마가 땅을 밟고 섰다.

지면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불길은 꺼졌지만, 잿더미 아래에서 아직 식지 않은 열이 살아 움직였다.

악마는 잠시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

“불도, 함께 흔들리고 있군...”


그들은 서로 다른 하늘과 땅에서 같은 징조를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먼 하늘 끝 어딘가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속엔 천상의 언어도, 지옥의 냄새도 섞이지 않은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조화의 바람이 아니었다.


균열의 향기였다.



(16화)회색의 언덕에서


바람이 불었다.

불길도, 빛도 닿지 않는 잿빛 언덕 위.

하늘은 금빛 균열을 품고 있었고, 땅은 아직 식지 않은 열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곳에 잿빛천사와 변화한 악마가 서 있었다.

둘 다 말없이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잿빛날개와 잘려진 뿔은 오래전보다 색이 바랬고, 빛과 불 사이 어딘가의 중간으로 변해 있었다.


잠시 후, 천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느껴지는가? 하늘의 빛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악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땅의 불도 식지 않았지.

불길은 잠든 줄 알았는데, 이제 다시 깨어나는 듯하군.”


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단순한 변덕이 아니다.

하늘의 질서와 지옥의 욕망, 둘 다 균형을 잃기 시작했어.”


악마는 잠시 웃었다.

“균형이라... 결국 우리가 만든 조화가 오래가지 못한 거군.”

“아니, 조화는 이미 존재했다. 다만 그걸 두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악마는 천천히 언덕의 흙을 한 줌 쥐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회색의 먼지가 흩날렸다.

“그럼 우린 뭘 해야 하지?

하늘은 감정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지옥은 새로운 욕망을 금기로 부르고 있어.

이해와 선택이 섞인 세상은 그들에겐 결함으로 보일 테니까.”


천사는 눈을 감았다.

“결함이라... 하지만 부족함이 없다면 생명은 자라지 못한다. 하늘은 완벽을 원하고, 지옥은 자유를 원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이에서 계속 흔들리며 자라나고 있ek. 그들이 가진 불완전함이야말로, 그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악마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답군. 아직도 인간을 믿는건가?”

“믿음이라기보다... 인정이다.”


천사는 조용히 답했다.

“그들은 우리보다 불완전하지만, 그래서 우리보다 더 완전해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


바람이 다시 불었고 회색의 재가 두 존재의 어깨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하늘의 금빛 균열이 조금 더 넓어지고 있었다.


악마가 그쪽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군. 이대로라면, 하늘과 지옥은 곧 다시 부딪히겠지.”

“그렇겠지.”


천사는 잠시 침묵하다가, 묵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움직여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뜻으로.”


악마가 미소를 지었다.

“결국, 우리가 불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군.”


천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길을 멈추기 위해서.”


두 존재는 나란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과 땅의 균열이 서서히 이어지고 있었다.

금빛과 붉은 틈 사이로 잿빛의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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