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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천사(14화) - 조우

by 장발그놈

불길이 꺼진 도시의 끝자락.

하늘은 여전히 붉었으나,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타버린 잔해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고, 회색의 재를 끌고 다녔다.

전쟁의 흔적은 식어가고 있었지만, 그 잿빛 속엔 아직 인간들의 슬픔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천사들이었다.

그들의 날개는 여전히 순백이었다.

그러나 몸을 감싼 옷은 묘한 회색이었다. 마치 빛과 그림자가 섞인듯한 색.

천상에서도 지상에서도 볼 수 없는, 낯설지만 이상하게 조화로운 빛깔.


그들은 마치 스스로의 빛을 조금 감싼 듯한 모습이었다. 빛을 버린 것도, 어둠에 물든 것도 아니었다.

그저 완벽함의 찬란함보다, 불완전함 속의 따뜻함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 옷의 색을 낮춘 자들이었다.


그들의 순백의 날개와 회색의 옷은 이질적이었지만, 오히려 그 불균형이 어딘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하늘에서는 ‘이해의 무리’라 불리는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타락한 것도, 추방당한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자들이었다.

하늘의 질서 속에서 완전함만을 좇는 대신, 불완전한 인간의 감정 속에서 진리를 배우고자 한 천사들.


그들은 빛을 버리지 않았으나, 그 빛을 낮추었다.

영광보다 이해를 택했고, 명령보다 공명을 택했다.

빛속의 찬란한 언어 대신 마음의 언어로 인간을 이해하려 한 자들.


그들이 폐허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갈 때, 대지의 균열에서 미열이 피어올랐다.

붉은 불빛이 바람을 따라 흐르고, 그 속에서 또 다른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증오가 아닌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왕의 낙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결심의 흔적으로 여기는 자들.

그들은 파괴보다 깨달음을, 유혹보다 관찰을 택했다.

자신들의 욕망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기 위해 지상으로 오른 악마들.

스스로를 ‘선택의 악마들’이라 부르는 존재들이었다.


두 무리가 서로를 마주했을 때, 공기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빛과 불, 이성과 욕망이 한 공간에서 맞닿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무기를 들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오랜 세월 억눌러온 자신들의 본질을 풀어낼 하나의 단초처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말을 건 것은 천사였다.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배우러 왔다. 그들의 고통이 어떻게 희망으로 변하는지, 그 과정을 알고 싶다.”


붉은 문양을 지닌 악마가 대답했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보러 왔다. 그 욕망이 왜 그토록 쉽게 고통으로 변하는지, 어떻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의미는 달랐지만, 그들이 찾는 곳은 같았다.

천사나 악마와는 다른 인간의 진실, 그 불완전한 아름다움이었다.


잠시 후, 무너진 잔해 너머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소녀가 손에 쥔 목각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한 천사가 조심스레 다가서서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다친 곳은...”


그 순간 한 악마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멈춰라. 위로만으로는 그녀의 상처를 지울 수 없다. 그녀가 왜 이 인형을 놓지 못하는지, 그녀의 욕망을 먼저 봐야 해.”

두 존재의 시선이 부딪혔다.

빛이 불길에 닿았으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교차점에서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희미한 회색의 빛이 피어올랐다.


소녀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인형의 떨어진 팔을 붙이려 애썼다.

갈라진 손 끝에서 피가 배어나왔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작은 손이 떨리며 인형의 팔 붙여보려 했지만, 틈은 더 벌어졌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붙잡고 있다가, 조용히 숨을 고르더니 인형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떨어져 있던 그 팔을 인형의 앞섶 속에 천천히 넣어주었다.

마치 언젠가 다시 이어질 날을 위해 그 상처를 따뜻히 감싸 안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녀의 표정엔 포기도, 슬픔도 없었다. 오직 ‘언젠가’라는 작지만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소녀는 걱정스레 바라보는 천사와 악마들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은 못 고치지만... 언젠간 고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이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천사와 악마는 동시에 그 자리에 멈췄다.

그들의 눈에, 인간이 가진 가장 단순하고 강한 힘이 비쳤다.


의지였다.

그것은 단순한 낙관도, 무모한 희망도 아니었다.


좌절 속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남의 도움으로 안주하려는 욕망에도 휘둘리지 않으며,

그렇다고 포기라는 이름으로 이성을 가장하지도 않는,

오직 현실을 직시하며 그 안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힘이었다.


그녀의 손끝은 피로 얼룩졌지만, 그 피는 절망의 흔적이 아니었다.

부러진 인형의 팔을 붙이려는 그 조그만 몸짓 안에는 삶이 자신을 다시 잇고자 하는 의지의 본능이 있었다.


천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형태이구나. 고통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려는 마음.”


악마는 그 옆에서 미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욕망의 본질이기도 하지. 이겨내고자 하는 욕망... 그게 인간을 살게 만드는 힘이니까.”


천사들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모두들 처음으로 악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이성을 이기지 않고, 욕망이 파멸로 흐르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찾아야 할 균형이겠지.”


악마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불완전한 손끝에서 생명의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빛은 천사의 순백도, 악마의 불꽃도 아닌, 묘하게도 회색에 가까운 빛이었다.

그 빛은 천사와 악마의 시선을 동시에 머물게 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 속에는 빛과 어둠이 나란히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천상과 지옥이 그토록 찾으려 했던, 이성과 욕망의 조화였다.천사가 천천히 말했다.

“그녀가 우리보다 현명하고 이성적이구나.”


악마가 낮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욕망을 가지는 거겠지.”


그날 밤,

그들은 폐허의 중심에서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감정과 욕망, 질서와 자유,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대해. 서로의 언어는 달랐지만, 결국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인간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배우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것이 그들의 첫 약속이었다.


그날 밤, 하늘은 붉지도 푸르지도 않았다.

오직 잿빛의 빛만이 그들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잿빛 속에서, 천사와 악마는 처음으로 서로를 ‘적’이 아닌, 이해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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