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의 기록
큰 게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울증과 함께한 지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이제는 그 징조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3일 정도 깊은 심해를 경험할 듯하다.
서둘러 오늘의 업무를 다 끝낸다.
조퇴 신청을 하고 일찍 회사를 나선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머리 한구석을 차지한 불안이 스멀스멀 번지고 있음을 느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는다.
옷을 벗어던지고 물에 몸을 담근다.
더위와는 다른 따스함이 온몸을 감싼다.
긴장된 몸이 이완된다.
이완된 몸은 물속에 있고, 내 머릿속의 불안이라는 먹은 조금씩 희석된다.
천장을 바라보다 지긋이 눈을 감는다.
아, 이건 아니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시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얼마나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몸에 힘이 들어간다.
파장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우울이 이제 잠시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욕조에서 나와 몸을 닦는다.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저녁 준비를 해본다.
감자인가? 파인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자르다가 눈앞이 깜깜해진다.
약지에 대각선으로 1/4 정도 칼이 들어간다.
칼날과 손가락 사이를 흘러내리는 피...
커다란 핏방울이 툭, 하고 떨어진다.
고통스럽지는 않다.
고작 핏방울 하나에 어지러진 주방과 아내의 걱정 어린 눈빛이 싫은 거지...
‘이거 병원 가면 꼬매자고 하겠는데? 약 바르고 대일밴드 잘 붙여놓으면 붙을 것 같기는 한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밴드를 감아준다.
그럭저럭 반찬 하나를 만들고 주방을 정리한다.
이제 심해를 향해 갈 준비를 해야한다.
거청한건 필요없다.
몸에 힘을 빼고 침대에 눕는다.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느낌으로 멍하니 있는다.
.
.
.
이렇게, 첫날이 지나간다.
아침이다.
눈을 뜬다.
울컥하는 감정이 있지만,
최대한 무덤덤하게 눈을 뜬다.
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뺸다.
멀뚱멀뚱 천정을 바라본다.
아무리 힘들어도 회사는 가야한다.
오늘은 거래처 결제일이고,
그건 내 업무중 중요한 부분이니까.
몸에서 최대한 의식을 뺀다.
내 정신은 이제부터 '관찰자 역활'을 수행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영화를 보듯 내 하루를 관람할 예정이다.
심리 상담 이전에는 '별개의 나'를 만들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나를 마음 한 구석에 쳐박아 놨었다.
그 병약한 내가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나를 분리시켰었다.
심리 상담 이후 알게된 해리 성향이 높은 나에게 별개의 나는 더 이상 쓸 방법이 아니었다.
내게 지금 필요한건 관찰자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탈중심화였다.
(둘다 장단점이 있으니 꼭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하에 실행해야 한다.)
이제 침대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식빵을 꺼내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돌린다.
그 사이 찬장을 열어 약을 꺼내서 먹은 후, 옷을 갈아입는다.
양말을 신고 가방과 차키를 챙긴다.
에어프라이어에서 빵을 꺼낸후 땅콩버터를 바른다.
내가 출근 준비하는 사이 아내가 싸준 도식락을 건네받고 신발을 신는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서두르는 순간,
주체못할 감정이 튀어나올게 뻔한 일이니까.
차키를 꽂고, 심호흡을 한다.
시동을 걸고, 출근을 시작한다.
멍한 눈빛의 내가,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가며 운전을 하는 모습을 보는건 재미있다.
나는 지금 운전 중이고,
나는 그걸 지켜본다.
한시간 가량 운전해 사무실에 도착한다.
시간은 6시 30분.
아주 이른 시간이다.
하지만 정체시간을 꼭 피해야할 날이다.
결코 울컥할 일을 만들어서는 안되니까.
최대한 덤덤하게 보내야만한다.
사실 우울이 옆에 없는 날도 내 출근 시간은 5시 30분~6시이다.
그게 내 감정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눈을 감은채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킨다.
오전 중에 내가 할일을 미리 다 해 놓는다.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퇴근을 한다.
어제 미리 말해놓은 덕에
회사 직원분들도 이 사실을 용인해 준다.
참 다행이다.
연차없이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집에 돌아와 다시 욕조에 물을 받는다.
어제와는 다르다.
더욱더 깊이,
심해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견딜만 하다.
이미 올 것을 예상했고,
대략적인 깊이마저 느낄수 있기에...
물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 화장실을 벗어난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끝내고 침대에 몸을 뉘인다.
이렇게 2일차가 지나간다.
다시금 눈을 뜬다.
어제보다 눈뜨기가 조금은 수월해졌다.
우울의 파장이 약해지고 있다는게 느껴진다.
내 '우울 흘려보내기'가 다행히 먹혀들어가고 있다.
'맞서지 않는다.'
가만히 비켜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우울에 맞서 이겨봐야 남는건 망신창이가 된 마음과 몸뿐.
초초해지지 말고 가만히 흘려보내면 될 일이다.
그래도 천천히 움직인다.
원래 오늘같은 날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조금 좋아졌다고 힘을 내려해서는 안된다.
바로 감정의 하향 그래프를 보게 될테니까.
찬장을 열어 약을 먹는다.
아내가 옆에 와서 어제 회사에 놓고온 도시락통을 가져와 달라고 말한다.
덤덤하게 오늘은 가지고 온다고 말한다.
아! 그러고 보니 아내의 말이 어제보다 잘 들리고 있다.
여유를 가지고 아내를 꼭 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해본다.
다시금 출근을 한다.
오늘은 왠지 음악이 듣고 싶어져서 라디오를 틀어본다.
잠시 라디오를 들었을 뿐인데 벌써 회사에 도착해 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내 자리에 앉는다.
자리가 지저분해 보인다.
천천히 정리를 한다.
깨끗해진 자리를 보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컴퓨터를 켜고 인스턴트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늘 할 일을 생각한다.
9시에 맞춰 거래처에 전화를 하고,
관련자료를 받아서 등록을 하면 오늘의 중요한 일은 끝이다.
나머지는 자잘한 일들.
이제 슬슬 관찰자를 벗어나 나로 되돌아가도 좋을 듯하다.
아니, 그래도 아직 조심스럽다.
천천히 지난 업무를 다시 체크해 본다.
힘들다고 내 일을 그냥 지나쳐 버릴 수는 없다.
혹시나 실수 한 일은 없나,
그냥 지나쳐 버린 일이 있나...
오늘 하루도 무난하게 지나갔다.
퇴근을 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무지하게 보고싶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현관문을 연다.
"나 왔어~"
최근의 나에게 실제로 있었던 일을 가능한 한 덤덤하게 써 내려갔다.
시간이 지나 이 글을 다시 꺼내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이 글을 다시 고치려 들 것이다.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방식이고, 누구에게나 맞는 방법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감정과 흐름은
미래의 내가 아닌, 바로 '지금의 나'만이 쓸 수 있다.
글의 시간적 순서에 어긋난다 할 지라도,
이 날것에 가까운 기록은 지금 이대로 남겨두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이전 글인 '징조', '새까매진 종이', '어느날 아침' 이 세글은 5년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