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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04. 2023

발 없는 새

메밀과 팥 그리고 목련 (가제) 

https://www.youtube.com/watch?v=M5gjHFmi2Co&ab_channel=CigarettesAfterSex


1.

바람둥이였던 시절이 있었다. 성장기 시절 부모가 부재했던 탓에 그런 것일까? 애착 형성 과정에는 부모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애정과 보호, 사랑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작 내 곁에는 부모가 없었다. 나는‘사랑’이 필요했다. 사랑하고 사랑받음으로써 나란 존재를 인식하고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이성과 만날 때마다 이성과의 접촉을 통해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끼곤 했다.      


대부분 시절 백수였던 내가 이성을 만날 수 있었던 수단(백수라서 소개팅도 안 들어 왔음 ㅜ)은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이었고‘틴더’라는 어플이었다.      


광고에서 말하는 동네 친구 만들기, 언어를 교환할 수 있는 친구 만들기 등 그런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하룻밤 상대를 찾으려고 했던 섹무새도 아니었다. 위에 열거한 그 중간이 나의 목적이었다.      


틴더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틴더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거칠게 말하면, 섹스를 목적으로 하는 어플이라는, 부정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 입장에 대해 반박하고 싶다. 사실 틴더 어플은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성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모를 때 꽤나 합리적이고 편리한 공간을 제공해 준다. 어디서 들은 이야기다. 최초에 틴더 어플 개발의 목적은 강아지 교배 어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개 주인들의 ‘교배 어플’이 되었다는 우스개스러운 말도 있다.      


틴더는 엄지 손가락으로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호 혹은 불호를 명확히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전의 어플들과는 조금 다른 형식을 제공했다. 본인을 나타낼 수 있는 사진과 자기소개 그리고 스포티파이와 연동할 수 있는 기능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취향을 간결하게 동시에 강력하게 나타낼 수 있다. 이런 기능 덕에 어느 정도의 취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매칭이 되기 때문에 대화의 시작 자체가 나쁘지 않다. 그렇게 대화가 잘 이어지면 카카오톡 그리고 전화 통화, 마지막으로 실제 만남까지 이어진다. 만남 이후의 행복은 각자 알아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내가 틴더에 올린 사진은 전부 나를 상징하되 직접적으로 나를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서재에 있는 라캉, 보르헤스와 같은 과시용 책들, 마일즈 데이비스 혹은 류이치 사카모토와 같은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의 앨범 커버, 끝으로 얼굴 사진은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고양이와 함께 꽤나 감성적으로 잘 나온 흑백 사진을 올렸다. 그리고 이런 감성과 취향을 좋아하는 상대에게‘좋아요’를 받았다.    

 

반면 내가 상대의 피드를 보고 좋아요를 누르는 경우는 대놓고 몸 자랑, 차자랑, 돈 자랑 등이 아닌 지적인 면모와 살짝 어두운 감성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피드를 보고 좋아요를 눌렀다.      


신기하게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직업, 취향이었고, 나와 같이 어느 정도 정서적 결핍이 있는 겨울 냄새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틴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불편하다. 자칫 잘못하면 여성 편력이 심한 사람으로 찍히고 또 이성을 많이 만난 것을 인생 최고의 자랑인 척 허세를 떠는 한심한 놈이자 전형적인 한남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틴더 그리고 연남동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공간을 통해 이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회 인문학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을 발견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조심스럽게 틴더를 통한 우리 세대의 사랑법 그리고 나가 연애에 실패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다.    

  

아마 첫 문장을 쓰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인트로를 인용해서 쓸 것이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나는 연애 고자입니다.      

 

인트로를 쓰고 있는데 틴더에서 만난 친구에게 이런 문자를 받았다.   

        

      너 아비정전의 아비 같다         


그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이 꽤 지나고 지금에서야 아비정전을 봤다. 그리고 그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쉽게도 얼굴이 닮았다는 게 아님)     


마음의 집이 없는 아비는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며 사랑을 찾아 해맨다. 상처 받을 까 두려워서, 상처 입은 자신의 내면을 감추려고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자신에게 멀어져가는 연약한 내면을 지닌,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한없이 끌리는 인물이다.   

   

아비는 방황하는 이유를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 찾으려 하나 제 인생을 그렇게 만든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진실을 깨닫지 못했던 길 잃은 청춘이다. 아마도, 그래서 그 사람은 나에게 아비의 잔영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비에게 1분이 있다면 나에겐 무엇이 있을까?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을 때가 있는데 그건 죽을 때지. ”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죽을 때 까지 날아다니는 새... 하지만 새는 그 어느 곳에도 날지 못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죽어있었기 때문이지”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었다”          


아비에게 여자를 유혹할 때의 1분은 찰나가 아니라 절대적 영원성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느낌. 무슨 느낌인지 알 것도 같다. 아비는 섹스를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각했던 것이 아니라 아마도 유혹 그 자체, 마치 열반과 같은 희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쾌락 그 자체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비와는 달리 나는 침대에서의 쾌락적 행위보다는 서로 끌어안고 자는 행위에 절대적 영원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 날 처음 본 남녀가 맥주 한잔을 하며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다가 서로의 눈동자에서 나를 발견한다. 그 눈빛이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촉촉해지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면, 나는 비로소 그녀에게 집으로 가자고 한다. 이때 “커피 마실래요?” 혹은 “넷플릭스 볼래요? 와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같이 있어 줄래요?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워 남녀가 서로 등을 돌리며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한다. 고요한 정적이 방안을 적시고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누구의 소리인지 모르는‘꼴딱’하는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한 쪽이 몸의 방향을 바꾸어 상대의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한다. 그렇게 나와 상대는 하나가 된다. 내 이마에 맺힌 고드름 같은 땀방울이 끝내 상대의 이마에 떨어질 때 관계는 절정에 이르며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후 벌거벗은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잠을 잔다. 다음날 눈을 뜨면 어느새 그녀는 사라지고 침대 옆 협탁에 있는 귀걸이 한 쪽만이 마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듯 유난히 반짝거린다. 

    

우리는, 그런 결핍있는 존재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쌔근쌔근 숨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가슴으로부터 심장소리를 느끼며 살아있음과 동시에 하나 됨을 느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정확히 쾌락 보다는 접촉에 대한 중독이었던 것 같다.      


나체로 상대를 끌어안는 행위를 통해 어머니를 발견하고 어머니를 통해 자궁 속에 있었던 완전한 충만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나와 아비와의 공통점이 있다. 상대가 나에게 빠져들면 비로소 나는 그녀를 떠날 준비를 한다. 완전함을 꿈꾸면서 불완전함을 즐긴다. 나는 정삼각형보다 역삼각형 상태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 상대방이 관계에 대해 물을 때 나는 차갑게 떠났다.      


2.

나에겐 새장이 없었다. 중학교 때 가정이 붕괴된 이후 평생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군대를 늦은 나이에 전역하고 연남동에 온 것이 2014년도였다. 당시의 연남동은 지금과 달리 사람 냄새나는 동네였다. 경의선 숲길이 완성되기 1년 전에 나는 연남동에 정착을 했고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떠나기까지 4년을 살았다. 

    

연남동은 나에게 있어 상징성이 있는 공간이다. 예술인들이 많아서 좋았고 동네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경계인인 나에게 연남동은 경계인들의 천국이었다. 아직 자본이 들어서기 전이고 또 대만 화교들의 동네라 그런지 오래되고 맛있는 중국집들이 많았고 그곳에서 음식과 술을 즐기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연남동에서 틴더를 처음 시작했다. 이십대 후반, 직업은 작가. 당시 내 또래의 여자들에게 나라는 사람은 꽤나 매력적인 사람인 듯 했다. 하지만 경계인들의 모양이 역삼각형인 듯 사랑 또한 역삼각형으로 가는 듯 했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면 상대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반면 상대가 나를 좋아하면 나는 상대를 떠났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패턴은 지금껏 나를 따라다닌다.      


시간이 좀 지났다. 내 나이 서른여섯. 이제는 불나방 같은 삶도 아비와 같이 사랑을 통해 존재 증명을 하는 시기도 지났다. 상대의 눈동자를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법도 이제 하지 않는다. 지나간 모든 이들이 마치 진한 담배연기가 허공으로 나가며 흩어지듯, 내가 방금 뿌리고 온 크리드 향수가 시간이 지남으로 인해 향을 혼자 자각하지 못 하듯 그리고 시가렛 애프터 섹스의 보컬의 얼마 안 남은 머릿카락이 점점 빠지듯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하고 싶다. 그녀들에게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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