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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Jul 21. 2023

그리운 그해, 함께하지 못한 여름  

침묵의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NtBzpX0_RAQ&ab_channel=harukanakamura


꼬따오에서 체류했던 2주의 시간동안 작고 소소하고 예쁜 것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삶은 굵직한 무언가로만 이루어져 있다고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굵직한 무언가 외에 비어져 있는 공간들은 일상의 작고 예쁜 아기자기 한 그런 것들로 색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먼저 사람들에게 인사도 건네고, 지나가는 고양이들과 강아지들을 따스하게 쓰다듬고, 타인이 버린 담배 꽁초도 줍기도 하고 걸을 때 엷은 미소를 띄우며 걷는다.      


그렇게 작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미학이 있는 꼬따오에서 서쪽 수평선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전의 황금빛을 매일 바라보며 따뜻하고 정적이고 또 무언가 슬픈 감정도 살짝 올라오는 시간들을 잘 즐기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수린섬으로 떠났다.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지만 (나한테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곳. 하지만 선선한 북서풍과 해변에 빽빽이 들어선 강인한 맹그로브 나무 덕분에 시원하게 잘 지낼 수 있었던 곳이다. 이곳도 오후 3-4시쯤 빛의 색과 바다색이 너무 예뻤다. 나는 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 꼬따오의 뜨거운 태양과 모래가 그립기도 하지만 이 섬만이 가지고 있는 침묵의 미학도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하루 종일 수영을 하고, 낮잠도 자고, [새로운 양식]과 [섬]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와이파이도 없고 데이터 또한 잘 터지지 않아서 그야말로 반 문명의 상태로 지냈는데 지루하지는 않았다. 온전히 침묵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행객들은 각자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낙조를 바라보며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멍을 때리기도 하고 간혹 들리는 연인 혹은 가족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잔잔한 파도 소리와 섞여 들렸다. 섬에는 어떤 음향 시설도 없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의 음악 소리는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오직 자연이 만들어 낸 음악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긴 침묵이 때로 나를 적적하게 만들 때면 적당한 때에 나의 친구들인 앙드레 지드와 장 그르니에를 불렀다.


[지상의 양식]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대가 굳세다고 믿으면 나는 미련 없이 삶과 작별할 수 있다’      


굳세다는 것은 두려움 없이 사랑에 빠져들 수 있는 자질을 뜻한다. 몸의 모든 감각을 일 깨우고, 완전히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가는 일, 손에 칼을 든 전사처럼 자신으로 들어가는 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일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사랑의 상념이 이곳에서 더 진해지고 깊어졌다. 가슴속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도 그렇다고 비우는 것도 아닌  애초부터 '무엇'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이곳에서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울하지도 외롭지도 배도 고프지 않았다. 단전 깊숙이 올라온 어떤 것이 목구멍을 지나 눈에 다다랐을 때 즈음 눈빛은 더욱더 또렷해지고 빛이 난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섬]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내가 굳게 믿었던 것이 사라져도 절망하지도 않고 또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해가 저물어도, 또 내 눈앞에 있는 모든 상들이 사라질지라도. 이게 수린섬에서의 3박 4일을 침묵으로 보낸 내가 그린 무늬이다.      


다음에는 지중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리스, 시칠리아도 좋지만 그르니에와 까뮈의 체취가 남은 북아프리카 알제에 가보고 싶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단추 세 개를 푼 흰색 리넨 셔츠를 입고 아랍 음악이 들리는 어떤 카페 골목에서 그리고 저 멀리 푸른 남색 톤의 지중해가 보이는 곳에서 예가체프와 오리지널 카멜 담배 그리고 그르니에의 산문집까지.     


언젠가, 다음에 쓸 나의 책의 주제는 무엇이 될까? 나이 마흔이 지난 나이에서 지나간 것들에 대한 소회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이들을 또 상실해서 쓸쓸한 감정을 바탕으로 쓴 것일까?      


나는 가수 김윤아씨를 좋아한다. 10여년 전, 그녀가 긴 공백을 깨고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앨범을 내고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했던 말들이 기억이 난다.      


“아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우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입구를 둘러싼 벚꽃 잎이 바람에 의해 떨어지면서 지나간 삶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그토록 아름다웠던 그 시절, 그 시간, 그립지요. 하지만 이제는 잘 보낼 수 있어요.”      


나의 다음 글도 아마 그런 것이지 아닐까 싶다. 사랑을 잃고, 무릎도 잃었지만 글을 쓰는 현재 이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함이 아닌 멋진 미소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지금 이 시절을 회상하고 싶다.     



그리운 그해 

함께하지 못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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