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의 겨울

by 장준영

https://www.youtube.com/watch?v=tyN8FHmGR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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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흩어지고, 사라지고, 소멸됐다.

지난해에 대한 소회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해와 달리 그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어느 날 유퀴즈를 봤는데 안성기 배우가 젊은 날, 유해진 배우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배우는 쉴 때 잘 쉬어야 해. 어떻게 쉬느 냐에 따라 다음 작품에 그대로 반영돼." 무명인 시절, 유해진 배우는 틈만 나면 남산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북한산 등산을 했다고 한다. 그 10년의 자양분이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덤덤하게 말한 게 인상 깊었다.


나의 시간은 단순히 파쇄된 것만은 아니었겠지. 죽은 듯 보이는 고목에 생명이 찾아오고, 땅속에서는 끊임없이 미생물들이 움직이며 다가올 계절을 역동 차게 준비하고 있겠지. 후회는 없다. 다시 또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 것이고, 기다릴 것이고, 쓸 것이고 또 기다릴 것이다.


다가올 봄은 변형을 소망하고 희망한다.


그런 변화의 욕망이 꿈에서 발현된 것일까. 몸에서 소나무만 한 숯 덩어리가 두 개나 나왔고 성충이 되지 못 한 번데기를 먹는 꿈을 꾸었다. 프로이트 박사의 꿈의 해석을 인용하자면 아마 변화에 대한 무의식의 간절한 갈망일 것이다.


나는 변화(change)보다 변형(metamorphosis)을 원한다. 가지고 있는 그릇의 크기를 유지한 채, 색을 바꾸고, 고여있는 공간을 바꾸길 희망한다. 나는 나의 그릇을 좋아한다. 20년 지기 친구 야누(고등학교 시절 별명이 야한 인우, 그래봤자 야동 많이 봐서 지은 별명임. 이후 인생이 안 야함.)는 나보고 간장 종지만 하다고 놀리지만, 아니 사실 간장 종지보다도 못 한 소주 병뚜껑 정도의 그릇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어느 순간 내 그릇이 깨졌있는 것을. 아무것도 담을 수도 없고 반대로 모든 걸 이미 담아낼 수도 있고. 지나고 보면 알겠지.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긴 겨울을 두고 암울하고 희망 없는 계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겨울은 삶의 일부이자 순환일 뿐 훌륭한 책과 영화에 둘러싸여 긴 겨울을 보내니 훗날 이 겨울보다 더 멋진 겨울은 없었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상(image)을 그려본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그리는지. 지독한 현실에 파묻혀 살면서도, 말을 타고 칼을 차는 무사처럼 이제는 달려보기로 한다. 하지만 형편없는 나의 글쓰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언젠가 시각화될 날을 그리면서 또 원하는 것을 업으로 자연스레 체인지업이 될 수 있는 그날을. 우리는 시지푸스니깐. 누가 안 알아줘도 돼. 안 돼도 돼. 무엇보다도 나는 알잖아. 치열하게 했다는 거. 내가 떳떳하면 돼.


2.

식당 아주머니에게 농담을 쳤다. 이모님. 죄송한데, 가스불 좀 켜주실 수 있으세요? 안 그래도 오랫동안 기다렸던 모든 것들에 실패해서 그런지 몸이 춥네요. 아니 나이도 얼마 안 된 청년이 그런 소리를 해요? 얼마 안 되다뇨. 내일모레면 40이에요.에? 그렇게 안 보여요. 모자 써서 그래요. 벗으면 전두환이에요. 전 망했어요. 유유 이거 먹고 죽으려고 멀리서 왔어요. 아이고 뭐 어쩌고 저쩌고. 헤헤 농담이에요. 아무렇지 않아요.


아마 아주머니는 봤을 것이다. 입은 웃지만, 눈은 울고 있다는 것을. 그게 얼마나 괴랄한 모습인가를.


난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걸까?라고 지금 다시 묻는다면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금도 말은 하지만 무의식은 아니겠지. 1년 넘게 기다렸던 사람도, 간절히 꿈꾸었던 상도 어떤 결과물도 맺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언젠가 상처로 드러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드러날 상처가 최소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은 선에서, 아름답게 표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3.


https://www.youtube.com/watch?v=9PepgmvgsAA&list=OLAK5uy_l4PaeOb7MRWkO2pDXT7ANanw60JLI3Yhk&index=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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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의 마지막 즈음, 에무시네마에서 봤던 블루자이언트를 봤다.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관람석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두 시간 내내 거침없이 휘몰아친 영화가 끝이 나고, 나를 포함한 몇몇 관객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앞자리에 있는 관객 한 명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뒤에 앉았던 나는 광화문 벤치에 앉아 펑펑 울었다. 나는 진정 주인공들처럼 젊은 시절 치열한 불꽃으로 타오른 적이 있던가? 목숨 걸고 내가 원한 상을 위해 달린 적이 있을까? 극 중 대사처럼 내장이 튀어나와 입에서 단내 나도록 무엇을 했던 적이 있는가? 끝까지 사랑을 했던 적이 있는가?


겁이 많았다. 그래서 적당히 후회하며 산다.


우리네 인생은 영원한 과도기. 그렇기 때문에 삶 곳곳에 숨어있던 낭만이 튀어나온다. 나는 가끔의 낭만 때문에 여태껏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코 끝나지 않는 끝인 아포리즘. 과거와 미래, 시작과 끝, 그 사이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 당신, 현재, 인류 우리 모두가 덧없고 흔들리는 우스운 존재인 동시에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존재. 고독하고 쓸쓸하고 불안감에 잠겨있지만 때론 터져 나오고 생의 강렬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영화는 20대 초반, 재즈를 시작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에서 끝이 났지만, 그들보다 대략 20년의 세월을 머금은 나는, 지금도 의문을 가지고 고독하며 쓸쓸하지만 삶의 감사함을 느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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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내리는 날, 반야와 산책을 했다. 반야는 셰퍼드와 똥개의 잡종이다. 다리는 짧고, 대가리는 크다. 이름의 뜻은 지혜(반야바라밀)인데 역시 이름과 그의 삶은 다르다. 반야는 원래 유기견이었는데 동네 스님이 데려와 같이 살고 있다.


산책 중 스님은 등산로가 아닌 비탈진 구간에서 반야의 목줄을 풀었다.


목줄에서 해방된 반야는 북악산을 이리저리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 하지만 다리가 짧아 언덕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고양이도 쫓고, 멧돼지도 쫓고, 꿩도 쫓고 가끔은 미쳤는지 내 다리에 자신의 물건을 사정없이 비비기도 한다. 나의 고양이 물루도 그러는데 짐승도 아는 것이다. 내가 ㅈ밥인지.


하얀 고요 속에 반야의 움직임은 채근담에 나오는 정. 중. 동 (고요함 속에 움직임) 이었다.


다른 개들보다 미끄러지는 일이 많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치 자기가 북악산의 호랑이인 것 마냥 포효를 지른다. 푸른 불꽃과 함께.


나는 그날 반야에게 반야를 배웠고, 시지프스를 보았다.



5.


많은 걸 깨닫게 해줘 고마웠지만, 지긋지긋한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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