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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병원비 120만 원, 매달 고정비 되다

셸 위 댄스 - 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140화

(별별챌린지 3기 - 48일 차)



들장미:찔레꽃 (꽃말 : 고독, 주의 깊다)



병원비 120만 원, 매달 고정비 되다


시어머님의 병원을 가는 날은 월초로 고정을 시켰다. 아무래도 회사 특성상 중순부터는 계속 야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중순째 되는 주말부터는 피로가 쌓였다. 시어머님을 뵈러 병원에 가는 시간은 편도로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다행히 가는 길이 아주 멀지 않았다. 왕복으로 하면 5시간 정도 이동시간이라서 아침 일찍 서둘러서 병원에 갔다. 시어머님 상태는 대학병원을 퇴원할 때와 별반 차도가 없었다. 다행히 옮긴 병원에서 치료를 잘해주고 있었다.


병원을 갈 때는 미리 마련해야 하는 준비물이 있었다. 시어머님이 사용할 기저귀와 시어머님이 드실 간식 등을 사 가야 했다. 출발하기 전 집 근처에서 미리 준비해서 가게 되었다. 먹을 것과 간식을 여러 가지로 사서 갔다. 아직 시어머님은 거의 먹을 수 있는 게 없으셨다. 그래도 두유 정도는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두유도 꼭 사서 갔다. 다른 먹거리들은 병원에 계신 간병인 분들과 같은 병실에 함께 입원해 있는 환자분들이 나눠드시라고 챙기는 간식이었다. 준비물을 다 챙긴 후 병원에 도착했다.


오 층짜리 건물이 온통 다 병원 건물이었다. 1층부터 5층에 각 병실에 환자들이 가득했다. 병원 건물 규모가 다소 큰 편이었고 병원 건물 내에 수술실이나 처치실도 별도로 있었다. 큰 수술은 못하더라도 간단한 치료는 모두 가능한 병원이었다. 2시간 이상을 달려 병원에 도착해서 1층에 주차를 한다. 주차장에서 병원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요양 병원에서 나는 특유의 오물 냄새가 슬슬 풍기기 시작한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냄새는 더욱 짙어진다. 시어머님이 계신 병실까지 걸어가려면 미리 중간중간 자물쇠들이 채워져 있어서 그 문을 관장하는 관리자들을 통과해야 했다. 건강 상태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환자들은 병원 밖으로 나갈 수도 있기 대문에 잠금장치가 조치된 것 같았다.


시어머님이 계신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환자들이 있는 병실이 이어져있었다. 시어머님이 포함된 병실은 모두 자율적인 이동이 불가능한 환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오물 냄새가 더욱 짙게 풍기면서 콧속으로 강하게 밀려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숨을 거의 쉬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빠르게 옮겨 병실까지 걸어갔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코는 어느 정도 마비가 된 듯 냄새에 다소 익숙해졌다. 냄새가 옅어진 것 같은 착각을 느끼는 대신 머리가 어찔어찔하게 아파왔다. 병실에 들어서서 시어머님을 보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시어머님이 우리를 알아볼 리가 없었다.


누워있는 시어머님을 보는데 잠을 주무시고 계신지 눈이 감겨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많은 시간을 잠을 주무시는 것 같았다. 누워있는 시어머님을 보는데 계속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요양 시설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시어머님이 살이 많이 빠져서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먹는 것도 못 먹고 움직이지도 못하니까 빠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급격하게 살이 빠져서 모습이 너무 안 좋게 느껴졌다. 워낙 살이 찐 시어머님을 뵙다가 갑자기 늙고 살이 빠진 시어머님을 뵈니 눈물이 핑 돌았다.


간병인분은 보호자가 병실에 오면 시어머님을 일부러 깨우기도 했다. 작은 실눈으로 시어머님이 눈을 뜨셨다. 반가움에 말을 걸어보지만 시어머님은 여전히 대화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눈빛은 그나마 나아졌고 자식을 알아보는 건지 남편과 눈을 마주치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두 달째도 다시 병원에 방문했다. 첫 달보다 차도를 보였고 미음을 드시고 죽을 드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살은 더 빠진 상태였다. 시어머님이 살이 너무 빠져서 병원을 가게 되면 마음이 착잡해졌다. 돌아오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시어머님을 담담하시는 간병인은 시어머님 이외에도 몇 분을 더 전담으로 간호하는 분이었다. 한 병실에 여덟 분의 환자들이 있었고 간병인은 병실에 최소 두 분이 계셨다. 각 병실마다 간병인이 소속되어 있어서 환자들을 전담하는 시스템이었다. 두 달째 병원에 갈 때는 전담 간병인분이 드실 간식을 따로 장만해서 병원에 갔다. 아무래도 24시간 붙어서 환자를 케어하는 분들이 간병인들이기 때문에 보호자는 간병인 분들께 환자를 좀 더 신경 써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이었다.


두 달이 넘고 보니 시어머님 상태가 앞으로 장기 상태로 접어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태로 얼마 동안 이어질지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인 건 시어머님 상태가 조금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비도 고정비로 됐기 때문에 그나마 앞으로 경제적 위험은 어느 정도 차단한 꼴이 됐다.


두 달 동안 대학병원에서 신용카드 할부로 결제했던 병원비가 할부로 한 달 치만 청구됐고 그 모든 비용은 내가 거의 다 지불했다. 남편의 소득은 이전보다 더 좋아지지 않았다. 두 개의 통장을 사용했던 것이 발각된 이후에는 더 이상 급여를 속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소득으로 두 달 전에 할부로 결제한 1600만 원의 카드 금액을 납입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시어머님의 요양병원비 120만 원의 고정비가 새롭게 발생되면서 그의 월급으로 자신의 용돈과 매달 고정 병원비를 내기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나는 미뤄뒀던 나의 거취를 고민해야 했다. 이혼, 이혼을 결심하는데 시어머님이 영향을 미친 것은 전혀 없었다. 남편과 나만의 문제였고 둘만의 문제로 나는 이혼을 준비했다. 그런데 예측 불가능했던 사고로 시어머님이 변수가 되었다. 때문에 이혼이 잠시 미뤄졌다. 급작스러운 사고가 어느 정도 정리됐고 이혼을 결행해야 했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순간순간 고민했다. 그러나 '어떻게 말을 꺼내냐'라는 고민이 들 때마다 계산기를 계속 두드리게 됐다. 남편이 혼자서 카드값을 내면서 시어머님의 병원비를 감당하고 살 수 있을까? 남편의 벌이가 좋아질까? 이대로 이혼을 하면 남편은 어떻게 될까?


남편,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서 남편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 2005년 당시 남편이란 존재는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었다. 이미 남이라고 생각했고 한 점의 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수도 없이 나 스스로에게 물어봤던 일이다. 털끝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이혼 이야기가 목에 걸려서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칠 것 같이 소망했다. 이혼을 하고 싶었다. 이혼을 해야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당연히 이혼을 해야 했다.

감정, 아무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감정이 남아 있었다. 단 한 가지, 그에게 남아 있었던 감정은 다름 아닌 죄의식이었다. 그에게 부모라고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엄마만 남았고 한 분뿐인 엄마가 의식이 없는 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살면서 가장 힘든 상태를 지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소득으로 유지하고 감당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 놓인 사람, 당시 혼자서는 자립할 수 없을지도 모를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 나에겐 한없이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내 하나뿐인 아이, 아들의 아빠였다.


내 아이의 아빠를 내가 버린다는 죄의식,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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