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증 서류를 들고 법원 건물로 들어갔다. 법원에는 이전에도 온 적이 있었다. 보통 내가 갔던 곳은 종합민원실이었다. 이혼을 하는 곳이 어딘지 데스크에 있는 분께 여쭙고 해당 층으로 이동했다. 그와 나는 여전히 2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가정법원 표지판이 보이고 안쪽에 사람이 있어서 여쭈었다. 바깥쪽 한편에 서류함에서 서류를 작성해 오면 된다고 했다.
이전에도 가정법원을 간 적이 있었다. 급여 사건이 있을 때 혼자 회사 근처 법원에서 협의이혼서류를 가져왔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우여곡절과 사건사고를 거치고 일정 시간 지난 후 찢어버렸다. 예행연습을 했던 게 도움이 되어(?) 서류작성은 간단히 끝냈다.
내가 먼저 한쪽을 채우고 그에게 나머지 서류에 기재하라고 건넸다. 그가 서류를 쓰는 동안 나는 다시 일정 거리를 두고 서있었다. 협의 이혼이라는 서류의 협의라는 좋은 단어가 지난한 시간에 마침표를 주었다. 접수처에 계신 분께 접수하고 잠시 순서를 기다렸다. 우리 말고도 몇 분이 더 이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가 일정 거리를 유지한 모습이 왠지 서글프다.
번호가 '우리'순번이 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와 나의 마지막 '우리'가 되는 때였다. 서류를 보던 판사님이 동의하냐고 묻는다. "네."라고 대답하고 4주 후에 서류를 한 사람 만이더라도 시청에 접수하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법원이라고 하기엔 아주 작은 사무실 안에서 아주 간단한 질의만 있었을 뿐이다.
이혼 절차는 호떡을 만들어내는 원형 팬에서 포실하고 달달한 호떡이 착착 한 개씩 구워져 꺼내지듯 간단하게 끝났다.
예전에 호떡을 집에서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만 해도 호떡을 만들려면 하루 전날 이스트를 넣고 반죽을 숙성시켜야 했다. 1990년대 초반에 만든 거라서 당시에는 고물로 흑설탕과 계핏가루와 깨를 조금 넣었을 뿐이다. 요즘엔 호떡을 집에서 먹는 것도 간단해졌다. 이미 다 만들어진 호떡을 데워만 먹어도 된다. 반조리 제품도 많아져서 만드는 것도 아주 쉬워졌다. 마트에 가면 간단하게 반죽만 해서 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된다. 고물도 여러 가지로 다양해져서 집에서 만들어 먹어도 훌륭한 맛이 난다. 호떡을 만드는 게 간단해진 것만큼 이혼도 참 간단해졌다.
법원 건물을 나왔다. 그와 이혼을 했다. 자동차 키를 받고 그에게 돈 500만 원을 송금해 주었다. 자동차 명의변경은 다시 날을 잡아서 변경하기로 했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나는 차가 있는 곳으로 갔고 차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5살, 아직 어린 아들과 대면했다. 아들의 눈을 보며 아들에게 말을 시작했다. "아들~ 엄마가 울 아들 엄청 사랑해~ 아빠도 아들 사랑하는 거 알지? 엄마, 아빠 둘 다 울 아들 엄청 많이 많이 많이 사랑해. 그런데 변화가 생겼어. 앞으로 아빠와 함께 같은 집에서 살지 않게 될 거야."
"어!"라고 아들이 대답했다.
"아빠 보고 싶으면 엄마한테 말해주면 아빠 볼 수 있으니까 언제든 말해주면 돼"
"아빠 안 와?"라고 아들이 물었다.
"어~ 이 집에는 오지는 않을 거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 아빠를 볼 수 있어"
아들의 표정에 의문점이 있는 것 같았다.
유치원 친구를 예를 들면서 유치원이 옮겨지며 헤어진 친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 각자 다른 집에 살게 된 거고 아들과 아빠, 아들과 엄마는 변한 게 없다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