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미취학아동~중학생

셸 위 댄스-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27화




새순


미취학 아동~중학생


돈의 관한 이야길 하려고 한다. 파이어족이 될 수 있었던 건 돈의 힘이 제일 컸기 때문이다. 파이어족이 되기 위해 딱히 노력한 건 아니지만 돈 벌고 돈 모으는 것은 열심히였다. 나는 초등학생이 되기 전부터 돈을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도 돈의 힘을 봤기 때문이다. 우선 돈이 있으면 든든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돈을 주면 엄마가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혼나는 일도 없었다. 집안 분위기도 좋아졌고 엄마, 아빠 부부싸움도 없었다. 돈은 문제 해결을 그 무엇보다 잘하는 쓸만한 녀석이었다.


생각해 보면 5살 때 첫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 같다. 동네 뒷산인 도당산에 활터가 있었다. 옛날에는 야산마다 활터가 있었다. 동네 뒷산의 크기가 상당히 커서 도당산에도 취미로 화살쏘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먼 거리에 과녁이 있었고 활 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활을 다 쏘고 나면 화살을 동네아이들에게 주워오는 알바를 시켰다. 먼 곳을 헤집고 다녀야 하니 고사리 손들 여럿이 찾는 게 어른들이 찾는 것보다 빠르고 시간도 절약되었을 것이다. 화살 한 개당 돈을 줬는데 나름대로 짭짤한 수입이었다.


어린 시절 다른 수입으로는 고물 모아 팔기, 빈병 모아 팔기, 이사 나간 집에서 쓸만한 물건 찾아 팔기 등 돈 될 만한 일이 있었다. 여러 세대가 사는 못하는 동네라서 이사가 잦았고 동네에 집들이 많아서 늘 돈 되는 일이 있었다. 꼬마 몇 명이 같이 다녔고 의외로 돈이 꽤 모였다. '티끌 모아 큰 티끌(?ㅋㅋㅋ)'이란 말이 있듯이 일 년 모으면 지폐가 몇 장이나 모아졌다. 어렸을 때 나는 돈을 쓰는 재미가 아니라, 모으는 재미를 느낀 것 같다. 먹고 싶은 게 있을 때도 돈이 있어도 돈을 모으느라 사 먹지 못했다. 그래서 다섯 살 어린아이가 과자나 초콜릿 도둑질을 했다. 모은 돈은 엄마를 주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달라고 한 게 아닌데도 나는 그렇게 했다.


어릴 때는 초콜릿이나 크기가 작은 과자정도를 훔쳤다. 부끄러움이란 걸 몰랐던 것 같다. 그저 맛있는 초콜릿을 먹는 게 행복했다. 이것저것 훔쳐서 집에 와서 다락방에 몰래 숨겨놓았다. 숨겨놓았던 초콜릿을 작은언니와 함께 나눠먹었다. 언니도 내가 도둑질을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린 그것의 잘못을 알기이는 너무 어린 나이라서 달달함에 빠져들곤 했다. 초등학생 2학년때까지 도둑질을 했다. 그쯤 되자 도둑질은 나름 선수급이 되었던 것 같다. 구멍가게뿐 아니라 문구점에서 지우개, 샤프심 등도 훔쳤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친구 지우개를 훔쳤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훔친걸 모두가 알지는 못했지만 선생님까지 나서게 되어 도둑을 찾기에 이렀다. 그 일이 아주 큰 부끄러움을 주어 나는 그날 이후 도둑질을 멈추었다. 돈이든 물질이든 훔치는 건 안된다는 걸 깨달았다.


남들 얘기를 듣다 보면 초등학생 때는 다들 나름 공부도 잘했다는데 나는 초등학생 때 가장 비행학생이었다. 2학년때부터 4학년 때까지 3년 동안 학교생활은 엉망이었다. 학교 가는 50분이 너무 멀고도 싫었다. 준비물을 안 해가면 선생님은 어린 학생을 수업 내내 교실 뒤에 서있게 했다. 그러나 나는 준비물을 해간 적이 거의 없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엄마는 아픈 날이 많아서 준비물이 있다고 아침에 돈을 달라고 엄마를 깨우면 늘 맞았다. 그럼 학교 가는 내내 울면서 갔다. 하루는 길바닥에서 다리를 구르며 울었고, 같이 학교를 등교하는 작은언니는 창피하고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 후부터 학교를 빠지기 시작했다. 준비물이 있는 날은 학교를 안 갔다. 생각해 보면 유급 없이 학년이 올라간 게 놀라울 따름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 도당동에도 학교가 생겼고 전학을 왔다. 반 친구들이 세 반뿐이라서 환경은 이전 삼정초교보다 좋아졌다. 5학년때 담임선생님은 젊은 남자선생님이셨다. 늘 쪽지시험을 봤는데 틀리는 개수만큼 발바닥을 때렸다. 숙제를 내주더라도 선생님이 숙제검사를 하는 게 아니라 발표를 시켰다. 더 많은 조사를 해온 학생이 있다면 계속해서 릴레이로 발표를 하는 방식이라서 숙제하는 것에도 재미를 붙여 주셨다. 나는 그때 까지도 지저분하고 덥수룩하게 다녔고 발바닥도 무지 많이 맞았다. 그래도 나름 어릴 때보다는 철이 들었고 5, 6학년에는 학교에 빠지지 않고 잘 출석하게 되었다. 맙소사, 개근상도 이때 처음 받았다.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 이미 아버지가 투병생활에 접어들었다. 아버지가 심하게 아프게 되면서 일을 잘 못 나가게 되셨다.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셨다. 엄마는 더 바빠졌고 자식들을 더 신경 써주지 못했다. 학교에 도시락을 거의 싸가지 못하면서 거의 매일 굶다시피 했다. 배가 고플 땐 운동장에 있는 수돗물을 먹는 일이 많았다. 가끔 부모님이 용돈을 주셨다. 그 돈으로 빵을 사 먹거나, 생라면을 부셔먹었다.


중1 때 첫 성적표가 나왔다. 반석차가 31등이었다. 52명이었는데 31등이라니 나는 너무 놀랐다. 초등학생 때 워낙 공부도 안 하고 학교도 자주 빠져서 유급이 될 지경이었는데 31등이라니 말도 안 되는 높은 등수였다. 초등학생 때는 반에서 꼴찌는 나라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점수로 표기되는 성적표를 봤고 등수가 놀라울 뿐이었다. 게다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경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우리 반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 성적이 32등이었다. 인기 많고 예쁜 경아보다 높은 성적이라는 게 더욱 놀랍고 신기했다. 그 당시 성적표를 게시판에 붙여놨기 때문에 전체적인 등수를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너무 야만적이다 ㅋㅋㅋ)


중학교는 허울만 있는 남녀공학이었다. 총 일곱 반인데 세 개 반은 남자, 네 개 반은 여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남학생들과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학교에 잘생긴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거의 연예인급 인기라 그 친구정도만 생각난다. 이성친구가 있는 아이들이 생겼지만 나는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인기 없는 나에겐 다른 관심이 더 중요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등굣길에 봤던 바바리맨들과 변태들이 가끔 기억난다. 그 시절엔 전국적으로 학교 근처에는 늘 성황 중인 게 그들이었다.


사춘기 나이에 생각이 많아졌다. 집안 형편은 안 좋았지만 잘 살아보고 싶었다. 중학생 때 처음 읽은 책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책이었다. 책 내용은 생각이 안 난다. 그러나 난생처음으로 끝까지 읽은 책이었고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춘기 중학생은 인생을 보다 잘 살기 위해 <공부밖에는 할 게 없다>는 생각에 공부에 열중했다. 학원 다닐 형편은 안 됐다. 겨우 부모님께 부탁해서 문제집 정도를 살 수 있었다. 혜영이란 친구가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라서 그 친구를 본받고 따라 했다. 영어는 단어장을 만들어 화장실 갈 때도 손에 들고 다녔다. 모르는 게 있으면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들을 찾아갔다.


야간 자율학습이 저녁 9시까지였다.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부모님이 데리러 온다는 확인을 해주면 밤 11시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나와 혜영이는 거짓동의를 한 후 11시까지 야자에 참여했다. 성적이 미친 듯이 올랐고 중3이 되자 반석차 7등이 되었다. 당시엔 고등학교를 성적순으로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높은 곳을 지망했다가 떨어질 경우 안 좋은 고등학교를 가야 할 수도 있었다. 우리 반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6등까지는 모두 부천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부천여고를 갔기 때문에 반석차 7등은 좋은 성적이었다. 내 등수는 부천여고를 가기에는 다소 아슬하고 소명여고는 충분히 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원하는 고등학교에 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병증이 심해졌다는 게 이유였다. 집에는 아버지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빚이 쌓이고 있었다. 큰언니와 오빠가 공장을 다니고 있었고 작은언니도 바로 취업을 하는 상황에서 나 또한 갈길은 정해져 있었을 뿐이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엄마는 4,5년마다 한번 올까 말까 한 외할아버지를 중학교로 보내서 고등학교 원서를 써버렸다. 나는 담임선생님께 통보를 받았다. "니 원서 외할아버지가 써버리고 가셨다." "네? 어디로요?" "정명여상. 상고 쓰셨어. 너 상고 가니?" 청천벽력 같은 통보. 무력한 나는 삼일을 내리 울기만 했다. 잘 살기 위해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중학생3학년 겨울방학 때 처음으로 공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두 달 정도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아 고스란히 전부를 부모님께 드렸다.


꿈이 무너졌던 중학생이 갈길을 잃어 헤매면서도 공장이란 낯선 곳에서 첫 경험으로 월급이란 돈을 받은 것이다. 그 돈은 잠깐 부모님을 기분 좋게 했을지도 모른다. 돈이 그렇게 소임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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