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정해진 진료였다. 반배정을 받아 처음 본 친구들의 모습은 날라리 끼가 다분해 보였다. 외모가 예쁜 얘들도 많았다. 나는 나 정도의 성적이면 전교 1.2등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을 둘러보니 왠지 성적 안 좋은 루저들이 모인 무리 같았다. 우리 학교는 상과 9반, 정보과 3반으로 되어 있었다. 1학년 1 학기말쯤 됐을 때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다가 입학 성적순을 보게 되었다. 웬걸, 총 150여 명이 모여있는데 내 등수가 10등 안에도 없었다. 10 몇 등으로 넘어가야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겐 충격이었다. 상업고등학교에 나보다 좋은 성적인 아이들도 온다는 게 신기했다. 성적이 나빠서 어쩔 수 없이 상고를 선택한 아이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가정형편상 취업 준비를 위해 온 아이들이 꽤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왠지 잘난 것 하나도 없는 나 자신이 꼴불견처럼 느껴졌다.
상고에 오니 입시위주의 공부가 아닌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해야 했다. 자격증을 따야만 성적이 올라가는 과목들이 꽤 있었다. 자격증을 따려면 학원이 필수였다. 선행과정일 뿐 아니라 특정과목들은 자격증 점수가 30% 별도로 있는 과목도 있었다. 그런 과목은 시험 시 만점을 받아도 자격증이 없으면 70점을 받았다. 여러 과목의 자격증이 필요했고 모든 게 점수와 연결되어 있었다. 1학년때는 그 갭을 메워가는 게 쉽지 않았다. 1학년때 반 석차가 10등 내외라는 게 마뜩잖았다. 나름대로 노력해 봐도 좀처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갭을 메구고 싶었다. 방학 때 더 바빠졌다. 자격증 시험공부에 열중했다. 혼자서 공부하기엔 무리인 과목들이 있었다. 부모님께 학원을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집안 사정이 안 좋았지만 세 과목의 학원을 보내주셨다.
부기 3급은 1학년때 학교에서 배워서 학원 없이 2학기때 딸 수 있었다. 부기 2급은 2.3학년때 배우기 때문에 학원에서 배워야 했다. 1학년 1학기말, 한 달 하고 일주일 후에 부기 2급 시험일이었다. 학원에서 25일 정도 상업부기수업을 해줬다. 오후 늦은 시간, 별도의 학원비 없이 번외로 공업부기를 일주일 속성으로 가르쳐줬다. 1주일 정도는 문제풀이 시간이 있었다. 1개월 학원비만 내고 진도를 나갔다. 시험을 치렀고 부기 2급 시험에 합격했다. 한 달 만에 딴 유일한 원생이라서 학원에서 홍보용으로 나의 합격내용이 활용됐다. <한 달 만에 부기 2급 합격생 발굴한 학원 0000>
정보처리과에 학생들이 별도로 따는 자격증으로 워드와 정보처리 기능사 자격증이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 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자격증들이라 학원을 다녔다. 워드프로세서는 2.3급을 따는데 세 달 학원을 다녔다. 정보처리 기능사 3급, 2급은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이 아니었다. 꽤 오래 학원을 다녀야 해서 부모님께 부탁드렸고 5개월 정도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절실함이 자격증을 따게 해 주었다. 각 교실마다 자격증칸이 있는 표지판이 있었다. 나는 일곱 칸을 제일 높은 급수로 채운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주산 1급, 부기 2급, 한글타자 2급, 영문타자 3급, 워드 2급, 정보처리기능사 2급, 팬글씨 3급> 당시엔 자랑스러운 훈장이었지만 요즘엔 필요 없는 유물 같은 자격증들이다. ㅎㅎㅎ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가 중국어였다. 고등학생 때는 한참 진로고민을 할 때였고 너무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다. 부모님께도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고 학교 측에도 대학에 갈 예정이라고 말씀드렸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깊이 고민할 때였다. 그 시절 나는 여행가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 여행을 한 번도 못 해봐서 더 그랬을 수 있다. 세 번 정도 아빠 따라서 낚시를 간 게 여행의 전부였다. 그리스 로마 책을 접하고 신화 속 장면이 있는 유럽으로의 여행을 꿈꾸기도 했다. 집을 벗어나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여행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꿈을 구체화해 봤다. 외국어를 공부해서 통역이나 번역일을 하며, 여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 2 때 전교 1등을 했다. 학교공부도 적응이 되고 재밌었고 친구들도 좋았다. 1학년때부터 열명정도가 같이 점심을 먹었다. 친구들은 점심때마다 나에게 밥 한 숟가락씩을 나눠줬다. 점심도시락을 싸 간 적이 거의 없던 내게 열사람의 한 스푼씩은 밥 한 그릇이 되었고 나를 키웠다. 나는 고작 사발면 하나씩을 사다 놨을 뿐이다. 친구들은 다이어트도 되고 적당히 먹는 게 좋다며 기꺼이 나에게 밥을 나눠주었다. 그런 친구들이 있었기에 건강하고 구김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2학년 때 학생회장선거에 참여했다. 정보과에 나 한 명, 상과에 한 명이 나왔다. 그 친구는 상과에서도 회장이 이번에는 나와야 한다는 전략을 세우며 회장이 되었다. 나는 선거에 져서 총학생임원이 되었다. 처음으로 겪은 선거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교훈이 됐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성적도 좋고 학교 내에서 임원도 했던 나는 취업 1순위였다. 상고는 2학년 말에 취업담당 선생님과 상담을 한다. 그때 내가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해서 취업담당 선생님께 찍히게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의 진로를 위해 대학 입시 시험에 돌입했다. 학원을 갈 형편이 안 돼서 독학해야 했다. 다행히 당시에 TV, EBS방송에서 수능대비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TV를 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 상태는 더 안 좋아졌다. 상당한 병원비가 나와서 병원에서 치료받기 어려웠다. 아버지를 위해 집에는 산소호흡기가 장착됐다. 집에서 TV를 보며 공부할 공간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독서실에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독서실에서 교육방송을 보며 대입시험을 준비했다.
대학시험을 치르기 한 달 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며칠 후 아빠가 부르셨다. 집안형편이 안 좋으니 대학에 가지 말고 일을 했으면 한다고 하신다. 나는 또 한 번 갈 길을 잃은 듯 허망했다. 혼자 고군분투한 게 서러웠다.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졸업 전에 취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학교에 가서 집안형편을 말씀드리고 취업 부탁을 드렸다. 취업담당선생님께 찍히고 담임선생님도 곱게 본 게 아니라서 기회가 바로 주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11월, 대입수능시험을 치렀다. 성적이 좋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겨우 수도권 낮게 평가된 4년대 정도 갈 성적이었다.
대입시험 후에 입사할 수 있는 원서를 단 한번 받았다. 3학년 다른 반 담임선생님이었던 맹 선생님께서 사정을 듣고 내게 별도로 원서를 주신 것이다. 회사는 S화재였다. 우리 학교에 딱 세 사람 원서를 받았고 한 사람은 맹선생님반 학생, 두 사람이 우리 반에 주어졌다. 그중 한 사람이 나였다. 10월에 1차 서류전형으로 맹선생님반 아이는 떨어지고 나와 같은 반 친구가 합격했다. 그리고 최종면접에 내만 합격하게 되었다. 1995년 고등학교 3학년 대입시험을 치르고 바로 11월 말부터 취업이 되어 직장인이 되었다.
돈은 꿈을 허물 수도 있고 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돈은 어린 학생에게 희망의 불빛도 주었고 좌절의 맛도 보여주었다. 돈에 휘둘리는 인생을 경험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