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아직 취업에 대한 압박이 없을 때였다. 선선하고 푸릇했던 봄에서 뜨겁고 짙어지는 여름, 6월에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집에는 내가 있을 곳이 없었다. 겨우 방 두 칸 있는 작은 빌라에 안방에는 아빠, 엄마가 사용하고 작은방엔 오빠가 새언니를 들여 같이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고등학교친구인 미영이 집에 가서 씻고 학교에 갔다. 미영이는 자매가 총넷이었다. 미영이 어머니는 내 도시락까지 다섯 명의 점심을 싸주셨다. 한 달에 한번 정도만 집에 다녀왔다. 무덥던 여름 어느 날 엄마가 삼계탕을 열 마리 이상 끓여서 독서실로 오셨다. 그동안 신세 지고 있는 막내딸의 친구들을 챙겨주시기 위해서였다. 작은 닭이 아니라 중닭 정도 되는 삼계탕이었다. 친구들과 배부르게 먹으며 독서실에서 잔치를 벌였다.
여름의 열기는 땅과 공기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니었다.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 중에 독서실 커플도 생겨났다. 미영이도 독서실에서 남자친구가 생겼다. 입시를 앞둔 청춘들은 밝고 환했고 예뻤다. 몇몇 친구들이 서로 오고 가며 마주치다 보니 핑크빛 짝대기를 이어갔다. 태생이 예쁘게 생긴 친구들은 자신을 꾸미는 것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나의 행색은 가관이었다. 학교의 머리길이 정책은 단발령으로 귀밑 3센티였다. 내 머리는 심한 반곱슬 머리로 단정하지 못했다. 교복은 물려받은 옷이라 후줄근했다. 부웅 뜨는 머리가 종모양으로 커서 대갈마왕 같았다. 앞머리를 스스로 자르고 다녔는데 자르는 것도 일이었다. 툭하면 자라난 앞머리가 눈을 찔렀다. 자르기도 귀찮아지자 실핀으로 앞머리를 올려 고정하고 다녔다. 그야말로 여고생답지 않은 참담한 모습이었다.(OTL)
어느 날부터 독서실 총무에 대한 이야기를 여학생 몇 명이 하는 걸 듣게 되었다. '총무가 잘생겼다느니, 착하게 생겼다느니' 하는 말이었다. 그 시절엔 각 독서실에 총무가 상주했다. 사장이 관리하는 곳은 거의 없었고 총무라는 아르바이트생이 학생들 관리를 맡아했다. 독서실 청소나 기타 비품정리도 했던 것 같다. 조용하게 공부도 할 수 있고 아르바이트비도 벌 수 있는 곳이라서 공부해야 하는 학생이나 고시생들이 주로 총무일을 했다. 우리 독서실에도 총무가 있었다. 여학생들끼리 키득거리는 것을 보자 그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 후 자연스럽게 총무에게 눈길이 갔다. 오고 가며 봤더니 준수한 외모였다.
19살에 나는 요즘말로 모태솔로였다. 짝사랑은 몇 번 해 봤었다. 대상은 주로 동네오빠, 교생선생님, 연예인등이 전부였다. 온사랑이 아닌 짝사랑인 만큼 나만 알고 잠시잠깐 품었던 반딧불같이 깜빡거렸던 미온적인 연심이었다. 짝사랑이란 말을 붙일 정도로 오랫동안 마음을 품었던 적도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같은 반친구가 잠시 멋있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주 봤던 오빠인데 사춘기가 되자 작은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할 때 얼굴이 붉어지고 설레는 감정을 느꼈었다. 고등학교에 더러 멋진 교생선생님이 부임하면 실습기간 동안 편지도 쓰고, 장난을 치며 두근거림을 경험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을 보며 드라마장면,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짝사랑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 장점과 단점이 있다. 마음속에 잠시 품었다가 언제든 그만할 수 있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고 그 감정의 주인은 오롯이 '나'이다. 상대방과 감정교류, 상호작용이 없으니 주체자는 속이 편하다. 선택은 내 몫이고 시작하기도 쉽고 끝내기도 쉽다. 그러나 짝사랑도 힘들어지는 시기가 올 수 있다. 마음이 고단해지면 엄청 피곤해진다. 혼자 가진 마음은 공허함과 상실감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면서 스스로를 괴롭힌다. 잠시 스치는 짝사랑은 힘들게 없다. 좋은 만큼만 하고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없는 것이 짝사랑이다.
고교3학년, 총무에게 눈길이 가면서 그를 살펴보게 됐다. 며칠 동안 그를 보다가 관심이 설렘이 되고 두근거림이 될까 봐 걱정됐다. 내 마음을 상대방이 알지도 못한 채 키우고 싶진 않았다. 혼자 키우는 마음이 싫어졌다. 그 마음으로 또다시 속상함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란 행위가 기브 앤 테이크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몰래' 혼자만 하는 짝사랑은 안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짝사랑을 하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깊은 산골짜기 아무도 모르는 동굴 안에 꽁꽁 가둬놓고 그 감정을 방치하다 결국 잃어버린 공허한 마음을 회수하지 못할 터였다. 짝사랑이 남긴 감정의 찌꺼기는 이미 경험한 것으로도 족했다. 주사위를 던져보기로 했다. 나는 총무님을 쪽지로 불러냈다. 대면했고 말하기 시작했다. "총무님이 눈에 자꾸 들어와요, 그런데 저는 짝사랑 같은 거 하기 싫어요. 일주일 시간드릴게요. 제가 맘에 들면 알려주세요." 다소 휘둥그레진 눈동자를 본 듯했지만 이내 돌아섰다.
<짧고 간결하게 용건만 간단히> 어떤 용무를 끝냈다는 듯 나는 독서실로 돌아가서 공부를 했다. 모습을 꾸민 것도 아니고 평소하고 다니던 그대로였다. '좀 꾸몄어야 하나?'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일상을 그대로 지냈다. 학교 다녀와서 독서실에서 EBS를 봤다. 하루하루가 더디게 지나갔다. 일주일이 되려면 아직 반이나 남았다. 4일째 되던 날 총무님이 나를 불렀다. 총무오빠는 나를 편의점으로 데려갔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줬다. 먹을 것도 고르라고 해서 간식을 샀다. 그리고 흉흉한 몰골의 내게 수줍은 듯 말했다.
"사귀자!"
뜨거웠던 여름날 밤. 나에게도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 허기졌던 밤에 커피 향이 진하게 퍼졌고, 달달한 간식거리들이 배를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