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셸 위 댄스 -인생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by 장하늘

81화

(별별챌린지 3기-7일 차)




금사슬나무(꽃말: 슬픈 아름다움)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2000년, 부천 학습관에서 중국어 수업을 마치고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이 있은 사람이 말을 걸었다. 남자였다. 말끔한 차림이었다. 약간 쑥스러운 듯 수줍게 말을 하고 있어서 늦은 시간임에도 경계심이 들지는 않았다. 낯이 완전 설지는 않았지만 언 듯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대방은 나를 알아보는듯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아마도 학교 사람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으며 같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에 똑같은 인사로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내 얼굴 표정을 읽은 건지 내가 그를 못 알아보는 걸 눈치챈 듯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저, 국어 국문과 방송대 학생입니다." "아~ MT, 반갑습니다." 그는 국어 국문과 선배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MT 때 내가 외간 남자를 안고 잤다는 사람이 바로 그 선배였다.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 때문인지 뭔가 더 순수해 보였다. 눈이 심하게 짝짝이 인지 한쪽 안경알이 유독 두꺼웠다. 키도 나와 비슷해 보였다. 높은 신발을 잘 안 신고 다녔어도 여자라서 그런지 남자들에 비하면 키 보다 4,5센티가 더 커 보였다. 키가 170 정도 돼 보이는 그가 앞에 서자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방송대 임원으로 과별 MT 도우미로 국어국문과에 봉사활동을 갔었다. 행사를 즐긴다기보다 말 그대로 봉사하는 날이었다. 1박 2일 동안 을왕리에서 사람들을 살피며 일하느라 무척 피곤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MT 장소 펜션에 도착해서 내내 일을 했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이 계속 음식 만들고 잡일을 하느라 하루 종일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늦게 인사를 하고 나니 여기저기서 술 한 잔씩을 권했다. 대부분 사양했지만 전부 사양할 수는 없었다. 못 마시는 술을 몇 잔 얻어 마셨고 취기가 올랐었다. MT의 일은 흑역사로 기록되어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고작 맥주 몇 잔에 취해서 인사불성으로 모르는 사람을 안고 잤다니 스스로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의 외간 남자와 떡하니 대면한 것이다. 어색한 분위기가 불편해서 오히려 과장되게 웃으며 대화했다. 거짓말처럼 한 달도 안 돼서 그와 나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나의 첫 연애기는 고등학생 때 시작됐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3 때 독서실에서 생활할 때 만났던 사람이다. 당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독서실 총무였다. 그는 고시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보다 네 살 많은 오빠였다. 20살에 그와 헤어진 이후 몇 년 동안 남자친구가 없었다. 딱히 남자친구라는 관계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썸띵을 가졌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을 뿐이다. 어떤 동갑내기 친구는 썸 비슷한 기운이 흐르다가 군대를 가 버렸다. 어떤 사람은 22살 첫 경험, 단 한 번의 관계로 몸에 통증이 심했고 처녀막 손상으로 피가 낭자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다. 한 아이는 사귀려고 보니 나보다 연하라고 해서 스킨십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기도 했다. 한 번은 실수로 오랜 친구와 뜨악 한 일도 있었다. 20대 초에는 나이도 어렸고, 겁도 많았고, 섹스를 좀 무서워했었다. 누군가를 사귀면 지속적인 관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기분 좋은 것도 아닌 통증이 유발되는 행위가 좋을 리 만무했다.


성인이 된 후 한동안 남자들이 스킨십을 하려고 하는 것에 거부감이 일어나곤 했다. 왠지 강해 보이는 남자는 좀 더 겁이 났고 마초적인 남자는 더욱 꺼려졌다. 친절하게 다가오고 의도적으로 잘해주는 사람들에게 자주 예민해졌다. 편안할 정도인 친구나 아는 오빠 정도가 좋았다. PC 통신 동호회를 통해 많은 이성들과 어울려서 놀았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귀는 건 선뜻 내키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두고 오랜 기간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소위 카리스마 넘치고 터프한 남자에게 나는 호감이 가지 않았다. 싫고 안 좋아한다기보다는 두려움이 앞서곤 했다.


20대에는 왜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깊게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무의식은 늘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하고 뭔가를 틀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어느 계기로 나는 그때의 두려움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6살 때, 여느 때와 같이 퇴근한 아빠는 외출한 엄마를 찾아오라고 어린 딸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날 왜 작은언니가 없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혼자 길에 있었다. 엄마가 갈 만한 곳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엄마의 자매들은 모두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엄마를 찾으러 동네 이모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시간이었고 골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치한을 만났다. 6살 어린아이에겐 엄청난 공포 자체였다. 그는 6살 여자아이를 위협하며 어두운 골목으로 아이를 유인했다. 그리고 그는 바지를 내렸고 자신의 성기를 빨라고 재촉했다.


6살, 어린 소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왜 고추를 빨라고 하는 줄도 몰랐다. 똥꼬나 똥처럼 오줌을 누는 더러운 고추를 왜 빨라고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들고 있는 쇠붙이가 너무나도 무서워서 벌벌 떨며 눈물만이 쏟아져 나왔다. 겁에 질려 울고 있는데 차갑고 무서운 칼이 내 목에 스쳤다. 소름이 끼치고 겁이 나서 눈물이 더 나왔다. "소리 내면 죽어" 겁박하는 소리에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어서, 빨아" 6살 여자아이는 고추를 빨았다. 역한 냄새가 입안에 들어오자 구역질이 나왔다. 그때 어쩔 수 없이 입 박으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람이 지나갔던 걸까? 여자아이를 두고 그는 달아났다. 울면서 엄마를 다시 찾으러 나섰고 계속해서 침을 뱉었고 연신 토를 했다.


서른이 넘었을 때, 어느 날 그날의 공포가 떠올랐다. 첫 기억은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이 기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그곳의 장면이 살아났다. 무의식 속에 있었던 섹스, 애무에 대한 거부반응이 그때의 트라우마가 원인이었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내 단 한 번도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고 나를 지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의식은 충격적인 사고의 기억을 깊은 동굴에 숨겼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이 한순간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치한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그는 분명 중학생 정도로 어린 학생이었다. 완전한 성인 남성이나 어른이 아니었다. 처음 생각난 건 그의 특정한 신체 일부의 형태였다. 떠오른 모습은 얼굴도 아니고 키도 아니었다. 안갯속에서 처음으로 선명해진 건 그의 고추였다. 고추가 완전한 어른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아이의 것도 아니었다.


고추가 생각나고 이후 그의 키가 생각났다. 큰 사람이 아니었다. 6살 아이에게는 큰 사람이었지만 서른의 내가 기억해 낸 그는 작은 사람이었다. 공포 때문에 남자가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어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들이 떠올랐다. 그 골목길은 중학교 근처였다. 한번 떠오른 생각은 안개를 천천히 거둬냈다. 두려웠고 더러웠고 무서워서 오랫동안 나의 무의식은 기억을 지웠었던 것 같다. 이전에도 꿈처럼 어렴풋이 생각이 나더라도 굳이 끔찍했던 기억을 소환하여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서른이 넘은 어느 날 나는 도망가고 숨는 것을 멈추었다. 몰두하고 그날의 일을 더 생각해 내려고 노력했다. 계속해서 기억해 낸 후 오히려 공포감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공포와 대면하자 한편으로는 아주 다행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곱씹어 생각해 보니 두렵고 힘들었지만 안도의 마음도 같이 들었다. 다행히 그날 6살이었던 나는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스킨십과 섹스, 애무에 대한 트라우마를 없애기 위해 나는 몇 년을 더 고생해야 했다.


2000년 가수 GOD의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 하는 외식 한번 한 적 없었고~'라고 시작하는 <어머님께>라는 노래가 여기저기서 많이 흘러나왔다. 신파 같은 그 노래가 자주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더군다나 어린 시절 나의 엄마는 진짜로 짜장면보다는 짬뽕을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자신이 좋아하시는 것을 자식들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엄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열풍을 일으킨 그 노래는 오랫동안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다. 나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마다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며 발을 굴려 한 번씩 하이킥을 날리곤 했다. "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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