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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안녕 Oct 01. 2024

소설 덕수궁 돌담길, 그 계절에1

2008년 첫사랑 짝사랑 멜로 연애

 ‘착륙을 하여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열일곱 살이 될 수 있다면?’

비행기 안에서 영종도를 내려다보던 은석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눈을 감고 떴을 때 덕수궁 앞에 도착했으면 좋겠다.’


 은석은 출입국 수속을 밟는 인파로 분주한 가운데 상상에 잠겼다.


 


 가을날의 덕수궁은 처음이었다.


 울긋불긋하고 샛노랗게 물든 나무를 바라보며 은석은 눈을 감았다. 이어 숨을 크게 들이쉬고 정취를 물씬 느끼며 돌담길 담벼락에 손을 댔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은석은 얇은 코트에 카메라 가방을 걸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봄날의 햇살을 느꼈다. 그리고 정말 열일곱 살로 돌아간 기분도 들었다.


 ‘툭’


 은석은 얼굴에 떨어진 단풍잎에 눈을 떴다. 이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은석은 그렇게 한참이나 단풍나무, 은행나무를 쳐다보며 봄볕을 찾으려고 했다.


 그 시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내부 전시실에서는 은석의 직품이 걸리고 있었으며 다원은 ‘다시세운상가’를 검색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다들 회의실에 모여 봐.”


 출장을 다녀온 부장이 허둥지둥 사무실에 들어오더니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소리에 다원을 비롯한 직원들은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덕수궁에서 ‘젊은 재독작가들의 서울’ 전이 열리잖아.”


 부장의 표정은 비장했다.


 “우리가 단독 기획으로 싣고 작가들 인터뷰까지 하기로 했어.”


 모두가 술렁이기 시작할 때 다원은 난감해졌다.


 “작가들 인터뷰요? 설마 전부는 아니죠?”


 “왜 이래? 손 기자. 전부 다 실어야지.”


 다원의 질문에 부장은 어깨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이번 주에는 윤석진, 강은석 작가가 시간이 된다네.”


 부장은 수첩을 뒤적이며 일정을 알렸다.


 “우리 중에 그때 일정이 맞는 사람이… 손 기자?”


 다원은 흠칫 놀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강은석 작가… 저 그날 대구에 가서 나인서 작가도 만나야 하고 영천에 있는 시안미술관에도 가야하거든요…”


 “맞다, 그랬지.”


 부장은 다시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다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돌아온 다원은 덕수궁 담벼락에 걸린 ‘젊은 재독작가들의 서울’이라는 현수막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마주한 은석의 이름과 얼굴은 선명했고 아찔했다.


 회의실에서 나온 직원들은 월간 ‘빛과 그림’의 신간호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15장에 걸친 ‘젊은 재독작가들의 서울’ 전시의 단독 기획 기사를 펼쳤다. 다원도 이번에 나온 신간호를 책상에 올려놓고 있었지만 단독 기사에는 손이 쉽게 닿지 않았다.


 “손기자.”


 부장이 다원을 불렀다.


 “네?”


 “강은석 작가랑 같은 고등학교 출신 아니야?”


 다원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같은 학교는 맞는데 저랑 다른 과이고… 졸업은 안 하고 독일로 간 걸로 아는데요.”


 “학교 다니면서 스쳐지나가지는 않았어? 잘 생각해봐.”


 윤기자가 거들었다.


 “모른다니까요.”


 다원은 은석과 관련 있는 질문이 성가시게 느껴졌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며칠 후에 명준은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의 수업을 끝낸 뒤에 월간 ‘빛과 그림’ 신간호를 펼쳤다. ‘젊은 재독작가들의 서울’ 전시의 단독 기획 기사를 보다가 명준은 다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시간. 다원은 버스에서 어두운 저녁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퇴근 하는 길이야? 그냥 오늘은 좀 일찍 마쳐서 연락해봤어.]


 명준이 보낸 문자를 보며 다원은 머뭇거리다가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다원과 명준은 두 사람이 살고 있는 효창동의 일식집에서 만났다. 둘은 마주앉아 우동과 라면을 먹었다.


 “같은 동네에 살아도 얼굴 보기 참 힘들다.”


 “그러게.”


 명준의 말에 다원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많이 고팠어?”


 다원은 우동의 바닥을 비울 기세였다.


 “점심이 늦어져서 어중간할 때 먹고 그러다보면 저녁도 그렇게 되고. 원래 오늘은 저녁 생각 없었는데 네가 문자해서…”


 다원은 갑자기 젓가락질을 멈췄다.


 “어떡하냐…”


 탁자에는 비어있는 초밥 접시가 수북했고 다원은 배를 부여잡았다. 명준은 그런 다원이 그저 귀여워 보였다.


 “먹방 보는 것 같았어. 찍어놓을 걸.”


 “ 너… 속으로 욕하지? 나 돼지라고.”


 “어떻게 알았지?”


 대답하는 명준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난 네가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


 “뭐야?”


 다원은 속상함이 묻어있는 투정을 부렸다.


 “이제 저녁에는 만나자고 하지 마.”


 “그럼 아침부터 만날까? 아니다. 꼭두새벽부터는 어때?”


 다원은 마지막 우동 국물을 마시며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밤길을 걸었다.


 “신간호 나온 것 봤어.”


 명준은 뭔가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어… 이번호는 좀 일찍 나온 거야. 다 봤어?”


 다원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두루두루 훑어만 봤지. 아직 자세히는 못 보고.”


 “그랬어?”


 어느 덧 다원의 집 앞에 다다랐지만 둘 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


 “아니야, 네가 가는 거 보고.”


 “우리는 매번 이런 식이야.”


 “그럼 오랜만에 가위 바위 보.”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원은 아이처럼 신나서 주먹을 내밀었다. 이어 명준도 마지못해 주먹을 내밀면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원은 보자기, 명준은 가위를 냈다.


 “난 왜 만날 지는 거지?”


 다원이 투정을 했다.


 “빨리 들어가.”


 명준은 우쭐해졌다.


 “빨리?”


 다원은 기가 막혀서 웃고 말았어.


 “아! 그랬구나. 알겠어. 그래 들어간다.”


 다원은 명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원이 사라지자 골목에는 적막감이 감돌기 시작했고 명준은 한동안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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