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공적인 질문에 대한 선택에 대하여.
마이클 샌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에 대해 생각할 때 기준이 될 수 있는 여러 관점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각 정의의 관점은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의 모습, 개별 사건에서의 정의로운 판단, 도덕에 대한 관점 등을 결정하는데 주요한 논거가 될 수 있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항상 동일한 주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도덕적인 의사결정을 할 때 하나의 의견은 다른 의견과 다른 결과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책에서 마이클 샌댈은 이러한 여러 주장에 대해 균형 잡힌 관점, 그리고 각 관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우리에게 각 관점을 하나하나 소개해줍니다. 균형 잡힌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정의에 관한 교양서를 논할 때 이 책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되는 관점은 공리주의입니다. 공리주의는 사람들의 쾌락을 의미하는 공리를 가장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이 가장 정의롭다는 관점입니다.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사람들이 쾌락을 느끼는 정도를 모두 더했을 때 가장 큰 방향으로 선택한다면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하면서도 명료해 강력한 법칙이지만 그만큼 복잡한 문제에서는 한계가 명확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공리를 측정한다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모든 행위의 결과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공리주의는 그 한계를 드러냅니다. 마약을 하는 것이 누군가의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했을 때 그 이유만으로 이를 허용하는 것은 어딘지 어색합니다. 공리주의적인 관점에서는 마약을 허용하게 되면 사회적인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일시적인 쾌락이 늘더라도 공리는 오히려 감소하게 되어 허용하지 않아야 된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공리주의의 취약성을 오히려 드러내게 됩니다. 결국 어떤 행동이 공리를 증가시키는지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입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먼저 선택하고 그 선택이 공리를 증가시키는 이유를 이후에 붙이는 경우가 더 많게 되겠죠. 결과를 해석하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문제 이외에도 공리주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의 공리를 뚜렷하게 증가시키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이나 소수를 희생시켜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을까요? 공리주의적인 관점이라면 허용해야 합니다. 누군가 한 명을 희생해서 수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의 희생해야 하겠죠. 하지만 이러한 행동을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공리주의는 밴담이 창시했고 이후에 밀을 포함 하여 많은 철학자가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결정적으로 공리의 판단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도덕적인 문제를 위한 실질적 해결책이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공리주의 이후에 등장하는 관점은 자유지상주의, 그리고 칸트의 입장입니다. 두 관점은 구체적으로 다르지만 하나의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지상주의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자유라는 가치를 절대적인 가치로 설정합니다. 자유로운 것이 언제나 좋다는 뜻이지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을 판단할 때 자유지상주의는 자주 등장합니다. 시장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결정이나 교환이라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자유주의가 확립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유의 가치는 너무나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유지상주의는 강력한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자유라면 언제든 좋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유지상주의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자유가 아무리 좋은 가치라고 하더라도 극단적인 추구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좋다고 평가되는 어떤 가치도 그것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해서 100%로 채운다고 할 때까지 좋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사랑도 과하면 독이 되는 것과 비슷하겠죠. 마찬가지로 자유 또한 적당한 수준이 중요하지 극단적으로 추구할 때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한다고 하면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생필품이 귀해진 틈을 타 폭리를 취하려는 행위를 막을 근거도 없고 아이를 사고파는 행위도 가능하겠죠. 돈이 있다면 뭐든지 가능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동의한다면 뭐든 가능한 것이죠. 더 극단적으로는 누군가의 생명조차도 돈을 주고 살 수 있습니다. 결국 자유라는 가치 또한 우리가 정의에 대한 의사결정을 할 때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이지만 혼자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유지상주의에 이어 자유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을 통해 절대적인 가치를 도출한 사람이 바로 칸트입니다. 다만, 칸트의 자유는 앞에서 이야기한 자유와 다릅니다. 내가 사고 싶어서 사고팔고 싶어서 파는 이러한 자유는 칸트가 볼 때 자유로운 일은 아닙니다. 이러한 행동은 나의 욕구에 지배된 행동이지 내가 자율적으로 한 행동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던진 공이 아래로 떨어질 때 공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 떨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행동은 우리가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중력과 같은, 욕구라는 녀석에 의해 행동하고 있는 것이죠. 칸트의 자유는 행동을 유도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오직 나의 순수 이성에 의해 결정된 행동을 하는 것이 자유롭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이러한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인간이 존엄성을 가진다고 합니다. 오직 자율적인 존재인 인간만이 존엄성을 가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는 행동은 도덕적이지 못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는 자살을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타인을 살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타인을 살해하는 것도 타인을 자신의 행위의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지만 자살 또한 자신을 행위의 수단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같은 논리에 의해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칸트의 절대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보다 더 튼튼합니다. 자유는 무한정 추구하게 되면 문제를 일으키지만 인간의 존엄성,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본다는 가치는 그 자체로 좋은 가치가 되는 듯합니다. 인간을 목적으로 대한다고 해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칸트의 도덕은 현실적인 문제에서 해결책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는 칸트의 도덕 법칙을 통해 행동을 할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할 때 나는 타인을 내 행동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행동을 판단할 때는 칸트의 도덕률이 큰 도움을 주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 문제, 정의는 우리 개인의 행동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 낙태에 대한 찬반 논쟁, 다양성에 대한 논의와 같이 요즘 우리에게 민감한 이슈가 되는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각자 자신이 주장하는 입장이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한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낙태 문제는 생명 존중에 대한 논쟁이 아닙니다. 생명 존중에 대한 문제였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낙태는 허용되면 안 되겠죠.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논쟁이 이어지는 것은 발생 초기의 배아를 인간으로 볼 것이냐에 있습니다. 수정란이 생기는 즉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낙태에 반대할 것이고 수정란이 발생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의 기관을 갖췄을 때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전의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겠죠. 결국 문제는 인간의 정의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인간이라고 여기는 지점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칸트의 주장은 강력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구체적인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 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으로 이어집니다. 정의의 문제는 결국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인 결정은 미덕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동선, 미덕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말로만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의 기여입학에 대한 논쟁에 미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됩니다. 대학의 기여입학은 자유지상주의의 관점에서는 허용해야 합니다. 기부금과 입학의 자격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행위인 것이죠. 이렇게 받은 기부금을 통해 학비가 부족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점 또한 기여 입학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여 입학에 대해 문가 탐탁지 않은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면 안될 것 같은데 어떤 근거로 이야기해야 할지 모호한 기분이 듭니다.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대학에 바라는 미덕은 학문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순수한 공간입니다. 지, 덕, 체를 갖춘 학생을 양성하는 것이 대학의 목적이자 우리 사회가 바라는 모습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미덕을 가진 대학의 입학권이 그저 부유한 사람이 살 수 있는 재화가 되어버린다면 그 대학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하던 대학과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좋은 대학을 좋게 바라보지 않겠죠. 좋은 대학에 갔다는 것을 그저 좋은 요트를 샀다는 것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결국 대학의 기여입학은 대학이 가지는 미덕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미덕을 증진시키는 결정이 아니죠. 그래서 기여입학은 정의롭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주요한 논쟁이 되는 문제를 살펴보면 이렇게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바라는 미덕이 어떤 것인지가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어디든 많은 돈을 내고 새치기를 해도 괜찮을까요? 유명한 가수의 공연 티켓팅을 선착순이 아닌 가격 경쟁으로만 한다면 그 공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티켓이 가수의 자선 공연에서 출발한 무료 티켓이었다면 암표로 판매되는 것에 우리는 더 많은 분노를 할 것입니다. 여기에도 결국 그 공연이 가진 가치, 미덕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이야기하며 책은 마무리되지만 한 가지 건너뛴 관점이 있습니다. 롤즈의 관점인데 자유라는 생각에 기반하지만 자유지상주의와 달랐던 칸트처럼 롤즈 또한 자유를 엄격히 정의하면서 사회의 구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칸트의 관점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아주 근본적인 절대선을 정의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본적인 절대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관점이었습니다. 롤즈는 이 둘의 중간 정도 크기에 해당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강력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굵직한 주요 사회 원칙을 세울 때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기본적인 틀을 형성해야 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기반이 되고 미덕이라는 개념이 세밀한 것을 돕는다면 일반 법령 수준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규칙도 필요합니다. 롤즈는 이러한 규칙은 자유로운 생각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때의 자유는 나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자유를 의미합니다. 세금을 늘려 복지를 증진시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나의 처지에서 주관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부유하다면 세금을 줄이고 싶을 것이고 내가 부유하지 않다면 복지가 늘어났으면 좋겠죠. 이렇게 의사결정이 이해관계나 나의 처지에 얽히게 된다면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만들 수 없다고 롤즈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롤즈는 이러한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개념을 생각해냅니다. 바로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입니다. 내가 아직 어떤 가정, 어떤 지위, 어떤 재능을 가지고 태어날지 전혀 모르는 상황, 즉 무지의 베일 뒤에 있다는 생각 하에 사회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겠지만 이러한 사고 실험 아래에서 판단할 때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가장 어려운 사람이 최선의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바라게 된다고 롤즈는 이야기합니다. 최소 수혜자의 최대 혜택 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롤즈의 이론은 복지국가의 이론적 기반을 형성합니다.
저자인 샌댈은 이러한 관점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구체적인 사례에 빗대어 장점과 단점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정의에 대한 논의가 그렇듯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소개된 모든 관점이 다 의미 있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폭넓게 이해하고 각 사례나 상황에 맞춰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책의 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이지만 정의란 무엇이라고 딱 정해주지 않습니다. 정의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