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성, 역사의 쓸모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한국사를 공부한 뒤로는 역사를 공부할 일이 없었습니다. 학교 시험을 보겠다고 책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을 외우고,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연도를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그 뒤로는 역사를 배울 일도 없었고,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참 오랜만에 역사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쓸모’, 이 제목이 아니었다면 아마 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책을 선택한 순간을 생각해보니 저는 쓸모를 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몇 년도에 어떤 일이 있었고, 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외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사건보다는 각자 자신만의 삶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남겨줄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그들의 삶에 연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통찰이나, 인물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으로 22가지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책을 다 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기억에 남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게 남은 이야기만을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정약용과 정도전]
책에 정약용과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가 한편씩 등장한다. 각각 조선 초기, 후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성이 ‘정’이라는 점이나 왕이었던 태종 이성계, 그리고 성종의 신하로서 신임을 얻고 그들의 다재다능한 능력으로 조선이라는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는데 도움을 준 것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정약용은 말 그대로 천재였다고 합니다. 대부분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의 면모를 생각하지만 실제로 정약용은 성리학에도 능통했으며 의학, 과학을 포함해 수많은 책을 저술하며 다방면에서 출중한 능력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그런 정약용에게 한 가지 커다란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였습니다. 정약용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는 집안이었고, 당시 조선은 천주교를 박해했습니다. 그의 능력을 알아본 성종의 신임을 얻고 본인은 종교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능력을 펼쳐 가던 정약용이었지만 성종이 죽고 방패가 되어줄 사람이 없자 약점은 다시 드러났습니다. 결국 정약용은 긴 유배를 가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여기까지가 정약용 인생의 1막입니다. 능력이 출중하지만, 그가 가진 배경으로 인해 몰락하게 되는 비운의 천재 정약용, 인생 1막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는 많습니다. 지금도 있을 수 있지요. 다만, 정약용을 빛나게 하는 건 그 이후, 그의 인생 2막인 듯합니다.
억울하게 유배된 정약용의 시련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반대파는 정약용을 그대로 두지 않았고, 결국 가문이 폐족 됩니다.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국가는 그, 그의 가문까지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원망하지 않을까요. 분하고 화가 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약용은 달랐습니다. 정약용은 500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렇게 많은 책을 쓰면서도 한 권 한 권을 대충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500권이 넘는 대부분의 책이 바로 이때 집필한 것입니다. 유배지에서 18년간 정약용은 500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가문의 종교적 이유로 억울하게 유배된 상태에서, 집 밖에 나가는 것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 제한된 상황에서 정약용은 책을 썼습니다. 그것도 악에 받친 일기가 아닌 백성과 나라를 위한 책을 썼습니다. 세상이 그를 버려도, 그는 세상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역사는 그를 위인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정약용이 유배를 간 뒤, 인생 2막에서 세상을 비난하기만 했다면 역사는 그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억한다 하더라도 비운의 천재, 그 이상은 아니겠지요. 정약용은 그가 처한 환경에 굴하지 않았고 스스로 방법을 찾고 이겨냈습니다. 이러한 정약용의 마음가짐은 글 말미에 정약용이 만나지 못하는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정약용에게 실패는, 그것이 아무리 억울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무너져야 하는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정약용이 대단한 이유는 그가 가진 다재다능한 능력 때문도, 그가 한창 관직에서 잘 나갈 때 올라갔던 위치도 아닙니다. 그의 인생에, 그리고 편지에 드러난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정약용을 역사에 남기지 않았을까요.
정약용 이전에 초기 조선에는 정도전이 있었습니다. 정도전도 마찬가지로 출중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 또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쉽게 타협하지 않았던 성격 상 정도전에게는 적이 있었고, 그들에게 정도전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라는 것은 정약용이 가지고 있었던 약점만큼이나 커다란 약점이었던 것이죠. 원나라 사신에 접대를 하지 않겠다고 해 유배를 간 뒤로 정도전만 오랜 기간 복직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약점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도전의 진가도 이때 드러납니다. 출신의 벽에 부딪힌 정도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칼을 갈고, 주변을 냉철하게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를 만나 모든 걸 뒤집고 조선을 건국합니다.
정도전의 이야기는 정약용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약용은 억울한 귀향에도 나라를 원망하지 않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 책을 쓴 한편, 정도전은 더 급진적이었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한 것이죠.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다릅니다. 다만, 둘 모두 자신에게 씌워진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진가가 드러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세상은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주저앉을 것인가, 그래도 할 만한 뭔가를 찾아볼 것인가의 질문에서 그들은 모두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후자의 선택을 기억해준 것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도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를 억누르는 제한은 어디에나 놓여 있습니다. 하나를 겨우 넘어서면 또 다른 한계가 앞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마치 ‘여기까지가 너의 한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매 순간 우리를 방해합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어딘가에서 쓰러지게 됩니다. 입시, 취업, 사회, 결혼, 쓰러지는 순간이 어디일지 모르고 지금까지 잘 넘어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언제 넘어질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쓰러졌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입니다.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태극기 부대에 관하여]
앞의 내용은 역사서에 등장했던, 누구나 알 법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한편 책에는 특정 인물이 아닌 시대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역사를 통해 풀어낸 이야기도 꽤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태극기 부대에 관한 것입니다. 꽤나 민감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역사 속 인물들과 달리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국정 농단 사건이 밝혀진 이후, 여러 번의 촛불 시위가 일어나고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되는 일이 일어나는 동안 꽤 많은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이때 태극기 부대도 등장했습니다. 일어나서는 안될 사건과, 이에 따른 국민 다수의 요구 그리고 적법한 헌법 절차에 따른 탄핵에도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탄핵이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분들이 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째서 저렇게 한 명의 사람에게 마치 신앙과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탄핵에 대해 무효라는 주장을 하는 것에 근거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전 대통령의 공적, 잘한 점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도 별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나라 경제 성장기를 이끌었던 대통령의 딸, 그것이 그분들이 탄핵이 무효라고 하며, 전 대통령을 탄핵에서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을 하는 그분들을 이 책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요즘 젊은 층은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나라가 어떤 빈곤의 시기를 겪었는지 모릅니다. 역사책에서 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고 설명한다고 해도 실제로 겪어 보지 않는 한 빈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반면 그분들은 그 시기를 겪은 사람들입니다. 전후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던 대한민국, 그 시기에 자식 세대에게는 빈곤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고, 독일, 중동으로 나가 어려운 일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힘든 시절을 함께 겪어 온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이상의 의미일 것입니다. 최악의 빈곤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시기를 함께 겪어온 동지이며, 그 시기의 지도자인 것이죠.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남다르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재의 태극기 부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책에서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러한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태극기 부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의 잘못은 그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분들이 과거에 어떤 시기를 겪고 현재를 맞이하고 있는지, 그 역사를 살펴본다면 조금은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옳고 그름은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표는 같다고 하더라도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에 우리의 이해가 담겨 있는 것이니깐요.
이는 비단 태극기 부대를 대하는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일상, 사회에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답답해하고, 화를 내기도 하며 옳은 방향으로 그들을 고치려 합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을 고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 확실한데도 그들은 달라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했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행동이 조금을 달라지지 않을까요. 책의 말미에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일은 상대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헤아려보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틀릴 때가 있으며 모두가 나와 같을 수 없고, 모두가 옳은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헤아려본다면 서로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