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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Oct 03. 2021

에리히프롬, 사랑의 기술

진정한 사랑은 결심이다.

'사랑의 기술'은 에리히 프롬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하여 심리학, 그리고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쓴 책입니다. 제목에서는 마치 연애 기술을 알려줄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심리학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와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인간관계에 대해 서술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철학 책에 더 가깝습니다. 제목 그대로 사랑에 필요한 구체적인 기술을 원하고 이 책을 편다면 머리말에서 저자가 직접 밝힌 것처럼,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그 기술이 ‘사랑받기 위한 방법’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이 책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내용은 프롬이 사랑에 대해 내리는 정의가 무엇이고, 왜 이러한 정의를 하게 되었는지를 그가 바라보는 현대 사회의 맥락 속에서 생각해 보는 것, 그래서 결국 사랑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 자체로 사랑의 기술을 깨닫는 데는 충분하겠죠. 그래서 사랑에 대한 프롬의 생각을 몇 가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우선 첫 번째,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책 제목이 ‘사랑의 기술’이라는 것을 가장 명료하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 이 말을 듣는다면 실망할 수도, 혹은 부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프롬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사랑에 감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프롬의 말 그대로, 사랑이라는 것이 결코 강렬한 감정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속적이고 완성된 사랑을 위해 우리는 사랑을 결단하고, 판단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죠. 감정은 일시적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즐거움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감정에 결부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기쁨이나 즐거움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에 사랑을 결부시킵니다. 그래서 사랑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됩니다. 사랑을 통해 기쁨을 얻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사랑과 일치시키게 된다면 반대로 기쁨이 사라지고, 즐거움이 사라진 순간에 우리는 사랑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했듯이, 감정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지는 순간 사랑과 감정을 일치시킨 사람은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다는 이유로 연인의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감정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극을 찾고 서로를 지치게 만듭니다. 프롬은 이 과정을 지적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사라져도 사랑은 존재합니다. 사랑은 기쁨과 즐거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결의이자, 판단이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의, 판단, 약속으로서의 이러한 사랑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해진 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프롬의 다음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프롬이 말하는 ‘활동’은 자신의 힘의 생산적 이용을 뜻합니다. 즉, 내가 가진 것을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 이때 누군가를 위해 만들고,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앞에서 말했듯, 사랑받는 방법, 기술을 기대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프롬에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물론 받기도 하겠죠. 하지만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는 것, 그리고 이후에 받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랑에 의해 자연스럽게 받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결심을 했고, 약속을 했다면 그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하고, 줘야 합니다. 여기서 자신이 가진 것을 활용해 준다고 하면, 물질적인 것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행복을 위해 함께 하고, 대화하고,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상대에게 존재만으로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프롬은 그래서 사랑에 신앙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프롬의 신앙은 신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인 것이죠.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미래에도 오늘과 같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지금 기대하는 바와 같이 느끼고 행동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결국 프롬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 즉 ‘자기 신뢰’에 도달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아무런 보증 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주는 것’으로서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프롬은 신앙, 즉 자기 신뢰를 갖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기 신뢰를 가질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 용기는 다른 의미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할 때 종종 ‘저 사람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나의 사랑을 맡기게 되고, 결코 ‘주는 것’으로서의 사랑이 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항상 든든하고 좋은 모습으로 있다면 이러한 상황은 잘 유지되겠지만 감정이 일시적이듯 그의 모습 또한 일시적입니다. 그가 변했다고 느낀다면 이 사랑은 흔들립니다. 그도 마찬가지겠죠,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신뢰하고, 홀로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프롬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봤을 때 제게 든 생각은 ‘사랑에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공간을 넓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사랑을 하기 위해 더 좋은 대상을 찾으려 합니다. 이상형을 찾고,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찾습니다. 외모, 돈, 환경 그 외 수많은 조건을 나와 빗대며 잘 어울릴지 고민하죠. 하지만 프롬이 말했듯, 사랑을 좋은 그림에 비유한다면 이는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내가 그릴 대상을 찾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캔버스에 좋은 대상을 올려놓으면 명작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캔버스, 물감, 그림을 그리는 실력을 준비해야 합니다. 캔버스를 넓혀 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넓혀 줘야 하고, 그 사람이 가진 색깔을 최대한 표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물감을 가져야 하고, 함께 그 그림을 그릴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혼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자, 더 넓은 마음을 갖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그 능력을 그, 혹은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 사용하자' 사랑에 기술이 있다면, 이런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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