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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 Jul 31. 2021

칸트, 실천이성비판

자유로운 나와, 내 안의 도덕법칙에 대해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

칸트가 자신의 도덕철학을 정리한 실천이성비판 결론에서 이야기한 말입니다. 그리고 칸트의 묘비명에 그를 기리기 위해 적은 문구이기도 합니다. 저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칸트의 도덕법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칸트의 이론은 관념어에 대한 정의,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요. 그래도 늘 하던 대로 칸트는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핵심적인 구조만 짚어보려 합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칸트의 도덕은 인지의 과정을 대상 중심에서 주체 중심으로 뒤집은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칸트 이전,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선'이었습니다. 진, 선, 미라고 부를 때의 그 '선'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도 종종 사용합니다. 누군가가 선하다고 이야기하지요. 이때 '선'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쉽게 말해 '좋은 것'입니다. 선의 개념을 처음 이야기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행동이 '선'을 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인간이 향해야 하는 최고선은 '행복'입니다. 즉 좋은 행동이란 무엇인가 하면,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동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면 그 행동은 도덕적이겠지요.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이러한 개념은 유사하게 형성되었습니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칸트 이후 이러한 관점이 뒤집히게 되는데, 동양에서는 꽤 오래 지속됩니다. 오늘날에도 동양에서는 선에 기반한 도덕관념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선이 내면화된 것을 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우리가 덕이 많다 라고 이야기할 때 선이 내면화되어 있는 사람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마음이 행동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칸트가 뒤집은 것은 이러한 선 중심의 도덕관입니다. 칸트는 선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선은 우리 공동체에게 좋은 것,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성을 내포하는 개념이라고 본다면 법은 의무입니다. 지켜야 하는 것이며 객관성을 내포하고 있지요. 칸트가 법칙 중심의 도덕 철학을 만들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시대상도 당연하게 한 축을 차지하고 있겠지요. 칸트가 살던 시대는 도시가 만들어지고 거대해지던 시기입니다. 과거에 마을, 장원과 같은 공동체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사람들의 삶의 단위가 도시라는 거대하고 복합된 공간으로 옮겨지던 시기입니다. 도시보다 작은 마을 단위에서는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생활 방식도 유사합니다. 대부분 농사를 짓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하게 지냅니다. 공동체의 선, 좋은 것을 결정하는데 어려움이 없지요.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고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에게 좋은 것과 우리 공동체에게 좋은 것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시는 개인적인 공간이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물론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히게 되지요. 나에게 좋은 것은 상대에게 나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도시라는 공동체에서 공동의 선을 규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 됩니다. 기존의 '선' 중심 도덕 관념이 한계에 부딪히게 되지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함께 보편적인 것을 추구했던 칸트라는 사람이 맞물려 법칙 중심의 도덕 관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따를 수 있는 도덕 법칙을 찾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칸트는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성을 띄는 도덕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개인적인 공간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으면서도, 모두가 같은 도덕을 가질 수 있는 원리를 구성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칸트는 내가 나의 도덕법칙의 입법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법 중심의 도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이라고 보기 어렵지요. 우리 사회에 만들어져 있는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고 할 때 법을 지키는 이유는 처벌이 두려움이 큽니다. 도덕과는 느낌이 다르지요. 칸트는 도덕적이라면 스스로 법의 입법자가 되고, 이 법을 존중하는 마음, 즉 양심에 따라서 자신이 만들어 낸 법을 지키며 살아갈 때 도덕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공동체의 규범이 아닌, 자유로운 의사결정 과정에서 스스로 도출한 법칙을 따르는 것이 칸트의 도덕이며 여기서 인간의 '인격성'을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자율적 입법과 법률의 준수가 가능한 것이 인간에게 다른 동물과 다른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이야기한 자율적 도덕 법칙의 입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스스로 법을 만든다고 해서 내 마음에 드는 행동을 모두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기에는 엄격한 도덕 법칙이 따릅니다. 칸트는 우선 좋고 나쁜 마음에 따라 하는 행동은 선하지 않다고 규정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길을 지나거나 TV를 보다가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기부를 할 때 동정심이나 안타까운 마음, 혹은 불편한 마음과 같은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면 선한 행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감정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고, 보편적인 도덕 법칙을 만들고자 했던 칸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감정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도덕적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웠겠지요. 칸트에게 도덕적인 행동은 그 동기가 반드시 스스로 입법한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와야 했습니다. 자 그러면 그 도덕 법칙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여기서 정언명법이 등장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복잡해 보이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칸트가 정의한 '형식'입니다. 칸트는 정언명법의 형식에 따라서 결정된 법칙은 도덕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도 이전의 도덕 철학과 다른 칸트의 특징이 드러나는데, 칸트는 도덕을 이야기할 때 어떤 행동만을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정언명법은 형식이며, 이러한 형식에 맞춰 각자가 스스로 법칙을 세우면 된다는 뜻입니다. 정언명법은 이러합니다.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말이 복잡해 보이는데,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준칙이라는 건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입니다. 나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기준이지만 아직 보편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이러한 준칙이 보편적이라고 했을 때 괜찮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행동하라는 의미입니다. 항상 정언명법이 나올 때 등장하는 예시인 거짓말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직 준칙이지요. 칸트는 이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는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회는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겠죠. 그래서 거짓말은 도덕 법칙이 되지 못합니다.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어떤 행동을 할 때 모든 사람이 그 행동을 해도 괜찮겠어?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된다면 도덕적이라는 뜻이지요. 이러한 물음을 통해 우리는 자율적인 입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언명법을 통해서 칸트는 모든 사람이 같은 도덕 법칙을 가질 수 있다고 봤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율적 입법과 이를 위한 정언명법의 규칙이 바로 칸트 도덕법칙의 기본적이 원리입니다.


칸트의 도덕법칙은 강력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답을 쉽게 제시해주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쟁점인 표현의 자유, 소수자, 낙태와 같은 문제는 정언명법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은 모두가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회가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언명법에 따라 입법하겠지요.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는 미풍양속을 해치기 때문에 나쁜 사회이며 정언명법에 따라 입법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어떤 문제들은 칸트 이전의 선, 좋은 것을 결정짓는 문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칸트의 도덕 법칙은 보편적인 원칙, 기본적인 것을 세울 때 의미가 큽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원칙, 자유와 평등에 대한 원칙과 같이 거대하고 근간이 되는 도덕 법칙은 정언명법에 의해 확립될 수 있지요. 또 칸트가 제시한 각자가 자신의 입법자가 되는 행동은 정언명법을 잠시 놓고 보더라도 오늘날 점점 더 중요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모든 사람을 획일화된 법으로 규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법을 고쳐나가면서 다양한 행동을 규정해갈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복잡해진 법은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만이 이해하겠지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법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개인이 사회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은 반대로 점점 더 비대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회에 해를 끼친다고 할 때 그 영향력이 크지 않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하면 자기 주변의 사람을 해치는 게 가장 문제 되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더 큰 범죄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칼 밖에 없던 사회에서 많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수많은 도구가 넘치는 사회가 됐습니다.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자동차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많은 사람에게 위험한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개인을 모두 규제하지는 못합니다. 규제한다고 하더라도 사후적 규제일 뿐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후에 처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은 되돌릴 수 없지요. 더군다나 그러한 범죄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사회입니다. 굳이 강력범죄가 아니더라도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졌습니다. SNS를 통해 내가 퍼트린 내용이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가 올바르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회가 가진 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의 행동을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입법자가 되는 사회가 필요하지요. 칸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행동의 입법자가 되고 이 법을 존경하며 행동할 때 사회가 더 건강하고 도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칸트의 묘비명, 그 문구를 이야기할 때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머리 위에 놓인 수많은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볼 때 스스로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고,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을 보게 되면 자율적인 입법자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존재가 있지만 인간과 같이 스스로의 행동을 자율적으로 규정하고 법칙을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다는 뜻입니다. 칸트는 그 지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느낍니다. 법을 만들고 규칙을 따르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느낍니다. 칸트는 자유가 없다면 오히려 인간이 이러한 도덕법칙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법칙의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자유로움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자유를 스스로 증명하는 도덕적인 입법자로 가득한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칸트가 기대한 사회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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