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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Nov 21. 2023

12.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becoming_회색지대의 리얼리티

날이 적당했다. 밤에는 되도록 외출하지 않지만 이자람 판소리 공연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세검정을 지나 부암동을 거쳐 서촌에 도착했다. 친구와 마주 앉아 통오징어 샐러드와 버섯 리조또에 화이트 와인을 한잔씩 주문했다. 음식을 먹으며 그동안 있었던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생일선물을 이르게 받았다. 만년필이었다. 본격적인 글쓰기를 응원한다고. 만년필에 잉크를 넣고 써본다. 윤서, 윤서라고 써본다. 부드럽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현대 사상의 입문>에서 만난 문장을 떠올렸다.


“모든 것은 도중이고, 진정한 시작이나 진정한 끝은 없다”


들뢰즈의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모든 사물은 상이한 상태로 ‘되는’(becoming) 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지바 마사야)는 원고를 쓸 때, 일단 컴퓨터를 열고 트위터를 보고, 그런 흐름으로 메일을 보고, 한 가지 답신이라도 해 볼까 하는 식으로 장벽이 낮은 것부터 시작한다고. 그러면 뭔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단다. 왠지 모르게 생각나는 것들을 그냥 쓰다 보면 글이 된다는 것이다.(68쪽)


이것이 들뢰즈식 작업술이다. 그런데 뒤라스의 <연인>에서도 비슷한 문장을 만났다.


“다 끝났다. 더 이상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길게, 이렇게 장황하게. 그녀는 술술 풀리는 글이 되었다.”


뒤라스의 <연인>은 그녀의 생애 속에서 오랫동안 되어(becoming) 왔다. 생애 전체가 소설을 쓰는 중이었고, <연인>의 집필을 마친 것이 소설의 끝도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작업이었다.


들뢰즈가 1925년생이고 뒤라스가 1914년생이니, 동시대 사람이고 두 사람 다 프랑스 사람이다. 한 사람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이고, 한 사람은 그 자장 안에서 글을 쓰는 작가다. 이 두 사람을 며칠에 거쳐 만나다니, 두 권의 책이 이렇게 이어지다니, 책 읽기의 즐거움이다.


"능동성과 수동성이 서로를 밀치고 뒤엉키면서 전개되는 회색지대, 바로 거기에 삶의 리얼리티가 있다."(29쪽)


들뢰즈는 철학 이론으로 리얼리티를 말하고, 뒤라스는 소설로 리얼리티를 쓰고 있다. 나는 오늘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시작했고, 결국 그 회색지대 안에서 읽고 있던 두 권의 책으로 글을 쓴다. 이것이 오늘,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윤서 '의 리얼리티다.


-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 입문>, 아르떼, 2023.7.5.

- 마르그리트 뒤라스 저/김인환 옮김, <연인>, 민음사, 20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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